판타지물에서의 고증의 문제

IT by 고어핀드 2006/10/27 00:22
1.

서양에 있어서 판타지의 전통은 상당히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가 보통 "로맨스Romance" 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본래 로마 제국 멸망 이후 라틴어가 각 지역의 토속어와 섞이면서 생겨난 속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들은 그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들도 사용하는 평범한 말들이었고 수도원 등지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라틴어를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기록된 책을 공부해야 했거든요. 책이란 게 이런 지식인들이 보는 성경이나 신학, 법학과 같은 걸 다루고 있었으니 당연히 거의 모두 라틴어였죠.

그런데 12세기 이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책의 수요도 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필요로 한 것은 어려운 이론 서적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따라서 성배를 찾기 위한 기사들의 모험이나 궁중 연애를 다룬 이야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이야기는 쉬운 속어로 기록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판타지 물이나 연애물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된 것이죠.

즉 서양 문명에 있어서 판타지 물과 역사물의 경계는 (적어도 그 시작에 있어서) 상당히 모호합니다. 유명한 <아더왕의 전설>이나 <니벨룽겐의 노래> 같은 경우도 상당히 역사물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자연히 서양에서의 판타지물 - 낭만주의 오페라라던가 - 은 역사적인 지식을 동원한 고증을 아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2.

이러한 전통은 현대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를 봐도 언뜻 보면 갑옷 등을 아무렇게나 "판타지틱하게" 디자인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방대한 역사적 지식이 녹아 있습니다.

닭치고 돌격!! -_-;

위 장면에서 곤도르의 기병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플레이트 메일Plate Mail이라고 불리는 갑옷으로 대략 13세기경의 유럽 기사들이 실제로 사용한 바 있는 갑옷입니다. 시기적으로 약간 이전에 쓰였던 쇠사슬 갑옷 체인메일Chain Mail처럼 후줄근하지도 않고, 보다 후기에 쓰였던 철판으로 관절까지 죄다 덮힌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r처럼 과학의 냄새가 나지도 않기에 기사도의 상징과도 같은 갑옷이 되어 후세 낭만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도 자주자주 보입니다. 뭐 <반지의 제왕>이 사극도 아닌지라 실제 완전히 똑같지는 않습니다만.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생긴 투구도 상당히 고심해서 만든 티가 나는 물건인데, 저렇게 묘하게 경사각을 둬서 만든 투구는 화살을 맞아도 스윽 빗겨 나가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직접 공격을 받아도 상대의 공격이 미끄러지는 효과를 가지게 됩니다. 당연히 중세에도 물방울형 투구라고 해서 같은 원리의 방어구가 사용된 바 있습니다.

이렇게 "기사도의 정석" 과도 같이 간지나는 무장을 걸친 곤도르 군대에 비해 로한의 군대는 상당히 후줄근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세 직전 암흑시대, 바이킹 전사들의 무구를 컨셉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로한의 기마대의 원안이 된 것은 토지를 소유한 바이킹의 지배 계급, 자알로 보입니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창과 쇠사슬 갑옷, 망토, 얼굴 전체를 가리는 기묘한 투구 역시 모두 당대 자알들이 사용했던 무구들입니다. 바이킹이 영국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던지라 자알이라는 말은 현대 영어의 Earl로 남아 귀족의 작위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뭐 이 친구들은 아예 건물 컨셉도 북구식 왕궁이더구만...

3.

어쨋든 판타지라는 물건이 머나먼 외국에서 굴러들어온 한국이나 일본, 중국 입장에서는 이러한 전통 따위는 어찌되든 상관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정체 불명의 시각 디자인이 마구 쏟아져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좋게 말하면 상상력을 무한정 발휘할 수 있다는 장점이 되니까요.

하지만 상상력을 빙자해 약팍함 혹은 유치함이 짙게 묻어나오는 디자인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면 울컥 쏟아져나오는 짜증은 말로 표현 못할 지경이 됩니다. 언젠가 "<반지의 제왕> 이나 <디아블로> 등에서 보이는 시각디자인은 한국에서는 절대 안 나온다. 풍기는 FORCE의 레벨이 다르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본 적이 있는데 어쩌면 이런 요소도 약간은 원인이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4.

전 요즘 <테오스 온라인>을 하고 있는데, MMORPG가 주는 경험이 그리 신기한 것도 아닌지라 여유를 가지고 게임 속을 찬찬히 살펴봤습니다.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제작된 게임인지라 색상이 상당히 알록달록하기도 한데, 잘 보다보니 묘하게 고증이 잘 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꽃의 묘사나 그림체 등에서 크레타 문명의 유적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는 벽화

언뜻 보면 그냥 예쁘장하게 그린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세계관의 분위기에 맞는 요소들을 지키면서도 예쁘장한 디자인을 선보이기 위해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애를 많이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외국의 경우와 비교해보자면 좀 모자란 건 사실입니다만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요.

...한국 게임에서 이런 걸 처음 보다 보니 어찌된 게 게임하면서 플레이에 집중은 안 하고 이것저것 구경하러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는 -_-;;

위: 테오스 온라인에 묘사된 고대 그리스의 주택. 아래: 실제 고대 그리스의 주택. 게임인 만큼 많이 예쁘게 꾸미긴 했지만 기본적인 특징은 지켜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뭐 어쨌든, 앞으로는 우리나라 게임들도 지킬 건 지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
2006/10/27 00:22 2006/10/27 00:22

http://blog.gorekun.com/trackback/1037

블로그이미지

About
고어핀드

기본적으로 댓글에는 모두 댓글을 달아 드립니다. 단, 제가 시간이 없어서 많이 늦어질 수가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Recent Trackback

1136508
Today : 81   Yesterday :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