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제는 남성성의 정도(!!) 입니다. :D
* 사이사이 빨간 폰트는 제가 적어넣은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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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지향성 : 0 점(-_-;) 지배욕구 : 56 점

반쯤은 맞습니다. 전 제 생각이나 결정에 대해서 확신이 높은 편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내리는 생각 혹은 판단이 변하는 경우가 별로 없죠. 설령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선택을 하던 그 시점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어. 최선을 골랐으니 후회따위 안 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차이점도 좀 있는데, 일단 전 선악의 구분에 별 관심이 없답니다. "선악의 구분 따위는 사회적 강자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기준에 불과한데, 왜 내가 그걸 따라야 해? 난 나 하고 싶은대로 할 거야." 라고 생각하거든요. 뭐, 이것도 제 근거없는 자신감의 한 표현 형태일지도 몰라요 :D
자신감이 강하고 뚜렷한 주관이 있으며 남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쉽도 있다. 보통 말하는 ‘사나이’의 전형이다. 뒤에서 따르기 보다는 앞에서 이끌어가는 스타일이다. 연애를 할 때도 미리 알아서 결정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따라주기만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다.
리더쉽은 개뿔 -_-; 다만 제 괴팍한 취향 때문에 다른 사람들한테 폐 끼치는 것이 싫어서 영화도 혼자 보러 가는 경우가 많아요. 어렸을 때부터 운동도 못하고 심하게 내성적이어서 소위 "사나이" 의 전형도 아니고.

다른 영화가 흥행하든 말든 관심있던 걸 봅니다 ^^
너무 상대방의 심정을 생각해 주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는 욕심만 부리다 보면 꼴통이라고 불릴 수 있다. 특히 연애는 댄스와 같아서 앞으로 나섰다가 뒤로 물러서는 리듬이 중요한데 당신은 앞으로 나서기만 하려는 댄서가 될 위험성이 높다. 혼자 춤을 출 수는 있어도 같이 호흡을 맞추는 연애는 많이 어렵다.
독불장군,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옛말은 중요하다. 당신이 훌륭한 리더쉽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지휘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따라서 당신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나 기분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신이 만족하는 일을 열심히 해서 더욱 더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다. 곳간에 인심 나듯, 당신이 만족하고 여유가 있어야 남의 마음이 더 잘 보일 것이다.

20세기 가장 유명했던 그리스 선박 재벌. 1906–1975. 오토만 제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 1차 대전 후 터키에 의해 모든 재산을 압류 당한 뒤 아르헨티나로 이주, 이곳에서 오나시스는 가족의 담배 사업을 성공시킨 뒤 승승장구, 그리스로 이주해 선박, 유조선, 포경 사업에 진출하며 세계 제일의 "선박왕" 입지를 굳혔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사업가이자, 가장 악명 높은 바람둥이기도 했다. 그리스 선박 업계의 거물인 리바노스의 딸과 (정략) 결혼을 해 2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결혼한 상태에서 세계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노골적인 염문을 뿌리다 결국 본처와 이혼, 본격적인 자유 연애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마리아 칼라스 때문에 이혼을 했으면서도 그녀와 결혼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여자들을 만나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그는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오나시스는 원래 결혼에 관심이 없었으나, 재클린의 고집에 의해 결국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러나 결혼 뒤 오나시스는 재클린을 "사치스러운 인형" 취급을 하며 또 다시 다른 여자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마리아 칼라스와 재회하며 재클린을 철저히 따돌렸다. 오나시스는 심지어 재클린과 저녁을 함께 먹은 뒤 바로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러 집을 나갈 정도였다. 그가 죽을 때는 재클린에게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은 채 연금 혜택만 주었다.
* 아마 "현대의 왕회장" 고 정주영 선생도 이 케이스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 회장은 평소 직원들과도 잘 어울리는 등 호탕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뭐, 이리저리 자식도 많은 당대의 쾌남이었다고도 하구요 ( --)

미국의 35대 대통령. 1917–1963. 명망 높은 정치 귀족 집안인 케네디 가문에서 태어나 최연소 상원위원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복한 뒤 미국의 영웅으로 칭송되며 역대 가장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는데 관계를 맺은 여자에게 단 한번도 마음을 주지 않은 것으로 악명 높았다. 심지어 자신과 결혼한 재클린과 (암살되기까지) 평생 불화를 겪었는데, 일부의 평가에 의하면 재클린을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애 낳는 기계"로 취급했다고 한다. 케네디는 원래 결혼에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30대 중반의 나이에 재클린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결혼 직전에 "총각 파티"를 위해 2주간이나 약혼자로부터 떨어져 지냈으며, 결혼한 뒤엔 재클린이 유산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뱃놀이를 나가 돌아오지 않는 등 무책임한 결혼생활을 했다. (한때 재클린은 이혼까지 생각했다.) 그는 철저하게 여성을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스스로 자신의 여자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들어와서, 벗고, 끝내고, 굿바이 마담." 그럼에도 수많은 여성들은 케네디를 사랑했고, 관계를 맺은 뒤 버림 받았다.

스페인 출신의 전설적인 화가. 1881–1973. 피카소의 연애 생활은 그의 작품 활동만큼이나 정력적이었다. 그는 여인들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는데, 매번 연인들에게 고통을 주며 일방적으로 헤어졌다. (정식 결혼은 단 두 번) 그는 23세에 처음 유부녀인 올리비에와의 동거를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들과 동거를 하며 예술 활동에 영감을 얻었다. (실제로 피카소는 매번 새로운 여성과 어울릴 때마다 작품에 빛을 발했다.)
피카소는 엄청나게 매력적인 남성이었으나 그 점을 이용해 여성들을 짓밟았다. 1911년부터 동거한 에바 구엘은 병약한 몸에 자주 앓아 누웠는데, 이때마다 피카소는 병이 점염될까 봐 혼자 이사를 가버리곤 했다. 피카소와 처음 결혼한 발레리나 출신의 올가는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고 아들까지 낳았으나 잔인하게 버림받는다.
워낙 수많은 여성들과 어울리고 씨를 뿌린 덕에, 피카소가 죽고 난 뒤엔 굉장한 소동이 벌어진다. 피카소의 3번째 동거녀였던 마리 발터는 피카소를 저승에서 보살펴야 한다며 목을 매 자살했고, 올가 사이에서 난 아들인 파블로는 약물 중독으로 사망, 손자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찾아왔다가 마지막 연인이었던 자클린 로크의 완강한 반대로 음독 자살한다. 그리고 자클린은 수년간 피카소의 다른 자식들과 유산 상속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이다 13년 뒤 권총 자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