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르지오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수』. 1914년, 캔버스에 유채.

굴렁쇠는 굴러간다. 아니 굴러가던 그 상태로 멈춘 듯 하다.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
그가 한 문명의 끝자리에서 세상에 남겨놓은 그림 『거리의 우수와 신비』는 우울하게 우리의 뒷덜미를 엄습한다.

단조로운 구도, 열주로 이루어진 긴 건물과 그 사이의 노란 길,

길에서는 한 여자아이가 굴렁쇠를 굴리고 있고, 길의 저 끝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긴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다. 분리된 채 놓여있는 화물칸, 그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딘지 알 수 없는 몸의 한 구석에서부터 불안과 우울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오는가?

- 이성희,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중에서

2.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그림 『거리의 신비와 우수』가 풍기는 분위기는 초현실적인 신비로움이다. 하지만 흡사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녹아내린 시계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지극히 사실적인 오브젝트들이 만드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한 살풍경함.

비밀은 이 그림의 구도에 있다. 이 그림의 원근법을 잘 보라. 왼쪽의 흰 건물이 이루는 빛의 소실점과 오른쪽의 그늘진 건물이 이루는 어둠의 소실점. 정상적인 그림이었으면 이 둘이 한 곳에서 만나야 한다. 하지만 빛의 소실점은 저 멀리 있고 어둠의 소실점은 바로 눈앞에 있다.

하늘은 틀림없이 어두침침한데 건물 사이에 난 길은 뙤악볕을 받은 듯이 밝고, 거기에 정체 모를 그림자까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여기서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이유 모를 불안함은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느껴지는 몽환적인 신비로움을 무겁게 짓누른다.

3.

이코와의 첫만남은 단순했다. 수능을 친 내가 기념할 만한 첫 콘솔 게임으로 구입한 것이 바로 이코였다.

이코의 패키지. 이 그림을 보고 앞의 그림을 다시 한 번 보자. 뭔가 느껴지지 않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된다. 그저 게임계의 쟁쟁한 상들을 휩쓸었다길래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이길래" 하면서 해봤을 뿐인데, 이 게임은 단박에 내 인생의 게임이 되어버렸다.

4.

사실, ico가 어떤 게임인지는 딱히 잡아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 게임은 거의 모든 점에서 원근법이 어긋난 그림만큼이나 이상한 물건이다. 몇 장 팔리지도 않았는데도 온갖 상을 다 휩쓸었고1 베스트 판이 발매될 정도로 컬트적인 팬들을 끌어모았다.

엔딩을 세 번이나 본 나 역시 ico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인지 잘 설명을 못하겠다. 그저 거칠게 정리하자면, "분위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게임"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이코라는 소년이 요르다라는 소녀와 함께 거대한 성의 미궁을 빠져나가는 퍼즐 게임이다. 그닥 퀄리티가 높지 않은 3D 그래픽을 보여 주지만 자연음 외에는 효과음 하나 없는 바다 속 안개의 성은 흡사 키리코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준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없을 듯한 몽환적인 신비로움. 몽둥이로 후려치면 연기처럼 흩어지는 검은 그림자들.

조르지오 데 키리코, 『The Red Tower』. 1913년.

요르다의 하얀 손으로 전해지는, 어떤 미소녀 게임보다도 기분 좋은 두근두근함. 구덩이를 건너기 위해 이코가 요르다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느껴지는 설레임. 그 어떤 게임도 주지 못했던 색다른 체험.

ico는 말이 없다. 게임 전체를 통해 나오는 대사는 한 페이지를 채 채울까 말까 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어떤 시나리오의 게임보다도 더한 경험을 선사한다. 주절대지 않고도 강렬한 경험을 전달하는 게임. 그야말로 "하길 잘했다" 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걸작이다.


조르지오 데 키리코, 『Return to the Castle』. 1969년, 캔버스에 유채. 커버 아트에는 그리 드러나지 않지만, 게임의 분위기와는 좀 더 직접적으로 닮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게임 속은 이 그림과는 달리 햇볕이 쨍쨍 비치는 맑은 분위기라는 점.


ico의 디렉터인 우에다 후미토는 조금 경력이 특이한 사람이다. 게임 하나의 제작을 지휘한다는 것은 게임 개발 전체를 꿰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게임업계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 맡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본은 그 경향이 더 심하다.

하지만 우에다의 경력은 게임과 거리가 좀 있다. 미술, 그것도 추상화 전공자로서 대학을 졸업한 뒤 광고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cg 애니메이터를 거쳐서 97년 SCEJ(Sony Computer Entertainment Japan)에 입사했다. 이 때 소년이 소녀의 손을 잡고 나갈 길을 찾아다니는 짧은 cg 동영상을 포트폴리오로 제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ico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디렉터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ico의 탄생은 정말 운이 좋았다. 발매 하드웨어가 Ps1에서 Ps2로 바뀌었지만 4년 동안이나 묵묵히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기술적인 조언이 가능한 카이도 켄지라는 걸출한 프로듀서가 뒤를 받쳐준 것도한 몫 했다. (* 이 두 사람은 한 쌍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 게이머즈 2005년 12월호 인터뷰에 의하면, ico의 게임 패키지도 손수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한다. 평소에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그림을 좋아하기도 했고 또 ico의 세계와도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패러디하는 기분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나.

ico의 모델이 되었던 웨일즈의 카나번 성(Caernarfon Castle)

특징은 시각적으로 굉장히 어필하는 게임을 만든다는 점. ico의 제작에 대해서도 "그림으로서 보았을 때의 완성도를 높여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고 밝힐 정도다. 실제로 ico의 후속작 <완다와 거상> 역시 게임을 하다 보면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그 외에도 미리 만들고자 하는 게임 세계의 cg 작품을 만들어서 이것을 팀원들에게 보여 준 다음 작업을 한다는, 특이한 작업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카이도: 우에다씨가 디자인하는 게임은 우선 내용, 핵심 아이디어가 먼저입니다. 시나리오나 스테이지의 구성을 생각한다든가, 플레이어의 모티베이션을 끌어올릴만한 요소를 넣는다든가, 세계관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조정한다든가 하는 건, 나중에 만들어 가죠. 일반적인 경우하고는 다른 제작방식이, 참신하다는 말을 듣는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에다: 스토리나 설정이 우선이 아니라, 그게 시스템과 맞는가 아닌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을 크게 하면 설명에 시간을 들이게 되기 때문에, 지나치게 어려운 스토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DICE 2006


  1. 이코는 2002년 국제게임제작자단체가 수여하는 제2회 ‘게임 디벨로퍼 초이스 어워드’에서 역대 최다로 6개 부문에 호보작으로 올랐고, 게임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AIAS(The Academy of Interactive Arts and Sciences)에서도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Art Direction 상과 Character / Story Design 상을 거머쥐었다 - 덕분에 이름이 알려져 결국 200만 장 가량이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