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르지오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수>, 1914년, 캔버스에 유채, 87 * 71.4cm
그가 한 문명의 끝자리에서 세상에 남겨놓은 그림 <거리의 우수와 신비>는 우울하게 우리의 뒷덜미를 엄습한다.
단조로운 구도, 열주로 이루어진 긴 건물과 그 사이의 노란 길,
길에서는 한 여자아이가 굴렁쇠를 굴리고 있고, 길의 저 끝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긴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다. 분리된 채 놓여있는 화물칸, 그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딘지 알 수 없는 몸의 한 구석에서부터 불안과 우울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오는가?
- 이성희,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중에서
2.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그림 <거리의 신비와 우수>가 풍기는 분위기는 초현실적인 신비로움이다. 하지만 흡사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녹아내린 시계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지극히 사실적인 오브젝트들이 만드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한 살풍경함.
비밀은 이 그림의 구도에 있다. 이 그림의 원근법을 잘 보라. 왼쪽의 흰 건물이 이루는 빛의 소실점과 오른쪽의 그늘진 건물이 이루는 어둠의 소실점. 정상적인 그림이었으면 이 둘이 한 곳에서 만나야 한다. 하지만 빛의 소실점은 저 멀리 있고 어둠의 소실점은 바로 눈앞에 있다.
하늘은 틀림없이 어두침침한데 건물 사이에 난 길은 뙤악볕을 받은 듯이 밝고, 거기에 정체 모를 그림자까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여기서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이유 모를 불안함은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느껴지는 몽환적인 신비로움을 무겁게 짓누른다.
3.
이코와의 첫만남은 단순했다. 수능을 친 내가 기념할 만한 첫 콘솔 게임으로 구입한 것이 바로 이코였다.

이코의 패키지. 이 그림을 보고 앞의 그림을 다시 한 번 보자. 뭔가 느껴지지 않는가?
* 이코는 2002년 국제게임제작자단체가 수여하는 제2회 ‘게임 디벨로퍼 초이스 어워드’에서 역대 최다로 6개 부문에 호보작으로 올랐고, 게임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AIAS(The Academy of Interactive Arts and Sciences)에서도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Art Direction 상과 Character / Story Design 상을 거머쥐었다.
4.
사실, ico가 어떤 게임인지는 딱히 잡아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 게임은 거의 모든 점에서 원근법이 어긋난 그림만큼이나 이상한 물건이다. 몇 장 팔리지도 않았는데도 온갖 상을 다 휩쓸었고(* 덕분에 이름이 알려져 결국 200만 장 가량이 팔렸다.) 베스트 판이 발매될 정도로 컬트적인 팬들을 끌어모았다.
엔딩을 세 번이나 본 나 역시 ico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인지 잘 설명을 못하겠다. 그저 거칠게 정리하자면, "분위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게임"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이코라는 소년이 요르다라는 소녀와 함께 거대한 성의 미궁을 빠져나가는 퍼즐 게임이다. 그닥 퀄리티가 높지 않은 3D 그래픽을 보여 주지만 자연음 외에는 효과음 하나 없는 바다 속 안개의 성은 흡사 키리코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준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없을 듯한 몽환적인 신비로움. 몽둥이로 후려치면 연기처럼 흩어지는 검은 그림자들.

조르지오 데 키리코, "The Red Tower". 1913년 작.
ico는 말이 없다. 게임 전체를 통해 나오는 대사는 한 페이지를 채 채울까 말까 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어떤 시나리오의 게임보다도 더한 경험을 선사한다. 주절대지 않고도 강렬한 경험을 전달하는 게임. 그야말로 "하길 잘했다" 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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