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 전근대식 스릴러

ETC by 고어핀드 2007/10/27 23:4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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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전 영화관에서 <궁녀>를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더군요. 미스터리물이기는 한데 이전에 봤던 <굿 셰퍼드>만큼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 영화 끝날 때쯤 전체 내용의 90% 정도는 이해가 가더랍니다. 하기야 <궁녀>야 말로 진정 제 취향 영화죠. 사극에, 기괴한 분위기에, 적당한 칼질과 유혈낭자(!!)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김미정 감독은 제가 좋아하는 이준익 감독의 제자이니 이런 영화를 안 볼 수가 없지요.

블로고스피어에서는 <궁녀>에 대한 악평이 쏟아지고 있는데, 저와 함께 영화를 본 분들의 의견도 완전히 양쪽으로 갈렸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평이 극대 극으로 갈리는 게 당연한 영화입니다. 기본적으로 추리를 해가면서 봐야 하는 미스터리물인데다가, 감독이 상징주의적인 표현(영화 마지막에 주인공 천령의 손바닥의 상처 등)을 즐겨 써서 약간 애매모호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을 이해하실 수 있다면 <궁녀>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런 데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안 보시는 게 더 나아 보이네요.

2.

개인적으로는 영화 <궁녀>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영화 그 자체라기보다, 이 영화가 점하고 있는 위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는 영화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 2007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의 주말 영화 관객수 집계입니다. 임수정 주연의 <행복>을 제외하면 모두 10월 18일 개봉한 영화들입니다. 입소문이 전혀 퍼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아래 표는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순수한 기대를 거의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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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가 코미디 영화 <바르게 살자>에 이어 근소한 차로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영화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보다 익숙하면서도 재미난 영화를 찾아서 영화관에 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궁녀>의 선전은 의외입니다. 이 영화는 차승원같은 배우도 없고, 이준익같은 감독도 없고, 게다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코미디 영화도 아니거든요.

3.

한국 영화가 발달하면서 사극도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몇몇 사극 -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혈의 누>, <음란서생>등등 - 은 히트작이라는 것 말고도 몇 가지의 재미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들 영화들은 상당히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다룬다는 점입니다. <혈의 누>는 영화 개봉 전부터 조선시대의 과학수사와 참혹한 사형방법(도모지, 육장...) 등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냈고, <음란서생>은 야설 작가가 된 선비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내세웠습니다. 이 영화들은 사극에서 전혀 등장할 것 같지 않은 캐릭터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사용해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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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이들 영화들은 전근대와 근대의 갈등을 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이들 영화들은 특별히 시대 배경을 지정하지는 않지만, 조선 후기 근대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 한글 소설책, 천주교, 천리경 등등. 비교적 현대적인 가치관을 가진 주인공이 관객들의 공감을 얻기 쉽다는 점도 강점입니다만 갈등 관계(주인공을 방해하는 전근대적인 통념)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상당히 선명하게 나옵니다.

더 나아가, 이 영화들은 이러한 배경을 통해서 풍성한 볼거리를 풀어놓습니다. 전근대적인 고문이나 사형 집행 같은 것들도 볼거리입니다만 사람들의 통념을 깨는 화려한 한복이나 안경 같은 고급스러운 소품들을 보는 재미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눈이 즐거운 영화를 마다할 사람은 별로 없겠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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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한 영화들은 이렇게 이야기거리가 될만한 소재, 또렷한 이야기, 진기한 볼거리의 삼박자를 무기로 흥행에 성공했고, <궁녀> 역시 이들과 같은 점을 공유합니다. 어떻게 보면, <궁녀>는 이들 영화의 친척 - 특히 <혈의 누>의 여동생뻘 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에 기대를 건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영화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에 영화를 본 것으로 보입니다.

<궁녀> 이후로도 이러한 경향이 계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극 팬으로서 앞으로도 이러한 류의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어 하나의 풍성한 장르를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무적 내의녀 천령(+그 제자)" 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D
2007/10/27 23:44 2007/10/2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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