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북벌을 행한 진짜 이유는?

HISTORY by 고어핀드 2008/01/03 09:58
* 일러두기: 아래 내용은 모두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기반으로 한 잡상입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의의 후반 주인공이 제갈량이다보니 그가 선주 유비의 유지를 이어 위나라를 친다며 후주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는 예로부터 "이 글을 읽고 울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충신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출사표가 유명한 만큼 제갈량이 북벌을 행한 이유도 선주와의 의리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약간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두 개의 촉나라


중국 역사에서 파촉巴蜀 - 현재의 쓰촨 성四川省은 꽤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쓰촨 성이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전국시대 진(秦)나라 혜문왕이 촉을 침공하여 병합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원의 사람들에게 파촉은 머나먼 이국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촉 땅으로 들어가기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다.(蜀道之難 難於上靑天)"1 고 할 정도로 외진 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촉 땅은 건국 신화도 따로 있고 언어도, 풍속도 중원과는 크게 다르다.

이렇게 독특한 지역이 파촉 땅인데, 정작 촉한의 지배 계급은 요상하기 짝이 없었다. <삼국지> 촉전을 보면 촉한의 주요 인사 중에 정작 파촉 토박이가 별로 없다. 상당수가 형주 사람이고, 그것도 주요 요직은 죄다 차지하고 있다. 재상 제갈량 뿐만 아니라 북벌의 물자 조달을 책임진 양의나 선봉장 위연 역시 형주 사람이다. 제갈량의 뒤를 이은 장완과 비위도 형주 사람이다. 오호대장군에 파촉 사람은 하나도 없고, 미축·간옹·요화·진도 등 유비 휘하의 고참들은 당연히 외지 사람들이다.

이렇게 된 건, 당연히 형주에 자리잡고 있던 유비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익주益州(=파촉)가 유비의 영토가 된 내역부터가 점잖치 못했다. 애시당초 이 땅은 한 황실의 종친인 유장의 땅이었다. 유장은 아버지 유언에게서 익주를 물려받았는데, 유언은 익주목사로 임명되어 익주에 오자마자 왕함·이권 등의 유력 호족들을 때려잡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사람이다 - 대대로 익주에 자리잡고 살던 토박이 호족들이 원한을 품었으리라는 건 쉽게 추측할 수 있고, 실제로 유장의 때에는 조위라는 호족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겨우 진압하기도 했었다. 법정, 장송 등을 비롯한 익주 토박이들이 유장을 밀어내고 유비를 끌어들인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덧붙임 - 조위의 반란에 대하여

그런데 이렇게 되면, 촉나라의 왕권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대도 필요하지만, 그 군대를 먹여살릴 농토나 피지배민들의 동의도 필요하다. 형주에서 들어온 유비 세력에게 군대는 있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가지기 힘들다. 그들은 엄연히 "외지에서 온 뜨내기" 이기 때문이다. 군대를 먹여살릴 농토와 지배 체제에 대한 피지배민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익주의 토박이 호족들인데, 이들의 협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한정된 농토를 나눠 가진다는 얘기는 곧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어야 한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유비가 형주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을 때는 익주 호족들 따위야 윽박지르면 그만이지만, 관우의 전사와 이릉 전투의 패배로 형주 땅은 오나라의 손으로 넘어갔다. 지방의 호족과 중앙 권력의 갈등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만, 촉나라의 경우는 이렇게 그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정치적 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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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출사표를 이야기하면서 제갈량의 충성심을 이야기하지만, 진짜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첫째로 촉나라가 위나라를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 둘째로 북벌의 명분이 이천년이 지난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을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라는 것. 선제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 - 최소한 "이라크 국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겠다." 따위의 대의명분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고 멋지지 않은가?

유비가 죽은 후, 촉한의 정국은 상당히 불안하고 어수선했을 것이다. 익주의 호족들이 자기 손으로 끌어들인 유비 말이야 잘 듣겠지만, 아직 어린 황제 유선(207년 태어나 223년 즉위했으므로 만 16세인 셈이다.)의 말을 잘 들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왕에 대한 충성심이 국가 성립의 기반인 고대 사회에서 왕권이 약화는 곧 국가 해체로 이어질 수 있다. 안 그래도 왕권이 흔들 흔들한 나라인데.

이런 상황에서 재상 제갈량이 취할 수 있는 최적의 수는, 외부와의 전쟁으로 국가적인 의지를 한데 모으는 것이다. 외부 세력과의 대결은 재산과 인력을 합법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동서고금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수법의 대표적인 예로는 북한의 남침 위협을 과대 선전하여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고 국민의 참정권을 빼앗은 박정희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박헌영 등의 좌익 독립운동가들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 처단하고 독재 권력을 수립한 김일성 등이 있다. 무엇보다 제갈량의 경우는 전쟁의 명분이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로 숭상받는 군주(선주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다. 당연히 백성들을 정권의 정당성을 설파하기에 좋고,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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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기산을 거쳐 여섯 번 북벌을 행하여 육출기산이라는 말이 남아 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제갈량이 북벌을 한 진짜 이유는 촉나라 내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제갈량이 죽고 나서 대규모 북벌은 중단된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형주 사람들이 익주 사람들과 많이 섞이기도 했을 뿐더러 유선이 나이가 들어 충분히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에도 강유가 혼자 북벌을 하겠다고 설치긴 했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재상 동윤이 1만명 남짓한 군대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었다 - 강유는 촉나라에 별다른 기반이 없는 뜨내기고, 전쟁으로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북벌을 주장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물론 나는 삼국 시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내 생각에 딱히 학문적인 근거사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이 제갈량을 훌륭한 정치가로서 기록한다는 점이, 과연 그가 겨우 의리 따위로 대국과의 전쟁을 결심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1.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 시 촉도난蜀道難의 한 구절. [본문]
2008/01/03 09:58 2008/01/0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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