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뭐든지 첫 경험이 중요한 법이라고 합니다만, 제게 있어서 대통령 선거라는 경험은 좀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참여하는 선거(지난 대선때는 투표권도 없는 고3짜리가 민주당사 앞에서 당선자 만세 외치고 있었습니다만)가 좀 개판이어야 말입니다. 지난 1년동안 보아 온 막장들만큼 제 담녁에 심대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할 뿐입니다. 뭐 이제 웬만한 막장에도 흔들림이 없는 평정심을 갖출 수 있을 거라고, 이거 웬만큼 비싼 보약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상 이롭겠지요.
한국 정치가 아무리 5류라지만 1년 내내 공약도, 노선도 없이 정치적 이합집산만 반복하는 꼬라지를 보자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저 역사적인 개판에 끼어들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호 8번 허경영을 찍음으로써 한국 정치와 유권자들을 조롱할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막판에 생각이 바뀌어 배신표를 던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문국현 찍었습니다.
2.
제게 문국현 씨는 꽤나 낯익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국현 씨를 그저 "돈 많은 유한킴벌리 사장" "군소 후보"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만, 이 분이 유한 킴벌리에서 행한 인적자원관리는 이상적인 인사관리의 예로서 경영학 교재에도 소개되어 있거든요.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 때 문국현 씨는 참신하고 인상적인 이미지로 제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책에서 접할 때는 물론이고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이라는 직책과 문국현 씨를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투표를 하고 온 지금도, 제가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 주저 없이 문국현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제 표가 가장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거는 결과가 결정적인 선거입니다. 제가 누구를 선택한다 해도 판세가 뒤집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문국현 씨는 참신한 만큼, 정치적 기반이 없는 사람입니다. 문국현 씨에게 상당한 표가 간다면, 정치 입문한 지 1년도 안되는 새내기에서 다른 정치인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괜찮은 정치적 기반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문국현 씨가 대통령감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웬만한 국회 의원을 상회하는 스펙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기회를 주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요? 총선이 바로 내년입니다.
또다른 이유는 - 이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인데 - 막상 투표권을 함부로 버릴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습니다. 흔히 20대들을 버림받은 세대, 혹은 88만원 세대라고 합니다만, 저는 현재의 제 또래 20대가 처한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우리 세대는 유신 세대처럼 배를 곯지도 않았고, 대통령에게 쌍욕을 퍼부어도 잡혀 가지 않는 엄청난 정치적 자유 - 386 세대는 상상도 못 하던 - 를 누리며 자랐습니다. 어떤 세대에게도 시련과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세대가 처한 환경이 별로 나쁜 환경은 아닙니다.
우리 세대는 아무 노력 없이 앞 세대가 이루어 놓은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열매를 손에 쥐었습니다. 이걸 아무렇게나 써버리는 게 과연 책임 있는 행동일까요? 게다가 올해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지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견 당연하게 여겨지는 투표권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얻어낸 걸 멀쩡히 아는 놈이 그 중요한 걸 함부로 장난치듯 내버린다면 전 배운 값도 못하는 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전 그러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3.
아마 한 숨 자고 일어나 보면, 금융 시장을 교란한 사기꾼이 17대 대통령으로 확정되었다는 끔찍한 사실을 확인해야 하겠지요. 지금까지의 공직자 인사 청문회에서는 내정자의 도덕성에 대한 검증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지만, 앞으로는 이 자리에서 전국구 철면피들을 대량으로 영접할 기회가 생기리라 믿습니다. "대통령도 위장 전입했는데 왜 나는 안되냐?" "대통령도 세금 허위 신고했는데 왜 나는 안되냐?" 와 같은 주옥과 같은 명언들이 청문회장에서 쏟아져 나온다면... 참 가관이겠지요. 어쨌든 국민이 불법을 승인해 주었다는 의미니까 말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런 꼬라지를 구경하는 것은 살아서 핼리 혜성을 보는 것만큼이나 희귀한 기회일 겁니다.
하지만 나중에 어찌 되었든, 최소한 내가 할 일은 다했다는 생각에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선거전도 끝났으니, 블로그에서 마음 놓고 까도 선관위에서 뭐라고 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있구요.
덧. 대통령 선거일에 쳐 놀고 해외여행 간 개자식들, 정치가 후지고 어쩌고 주절거리면 주둥아리에 인두 박아버린다. 닥치고 있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