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먼지가 되어버린 자들에 대한 기록

2008/04/22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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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른 시 마르크트 교회 창문에 그려진 그림. 피리 부는 사나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1284년 6월 26일 요한과 바울의 날 아침에,
남자는 다시 하멜른의 거리에 나타나
골목길에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쥐가 아니라
네 살 이상의 아이들이 달려나왔다.

아이들은 남자의 뒤를 따라 산으로 갔다가
남자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가 펴낸 동명의 책 이름이다. 우석훈 박사는 현재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면서, 비정규직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의 평균 소득 비율 74%를 곱해서 이 용어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말은 짧은 시간1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용어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 그대로 평범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꽤나 새삼스럽다. 역사는 보통 칼을 찬 지배 계급의 이야기만을 할 뿐, 묵묵히 살아가다 먼지가 되어버린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의 9할을 차지한 것은 그들의 이름 없는 삶인데도 말이다. 더 나쁜 건 이것이 단순한 역사적 오해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칫 그러한 식으로 역사를 이해한 사람은 "역사는 위대한 사람 몇몇이 결정하는 것이고, 이름 없는 대다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 함부로 희생시켜도 된다.)" 는 류의 생각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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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아베 긴야 저, 양억관 역.
한길사, 272쪽, 2008년 1월


아베 긴야의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그런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책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마도 이야기가 갖는 특유의 드라마틱함과 괴기스러운 결말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전설로 치부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한 기록(1284년 6월 26일이라는 구체적인 시점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가 이 전설을 역사적인 실재 사건으로 생각해 왔고, 또 이를 밝히기 위한 시도 또한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이 책은 그러한 연구 성과에 대한 대중적인 접근이다.

약간 김이 새는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이것이 피리 부는 사나이의 실체다." 라고 콕 집어서 결론을 들려 주지는 않는다. 전설이란 평범한 이들의 삶이 응축된 결과물이므로, 이것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이 전설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들(제데뮌데 전투설, 동독일 식민설, 축제일의 사고설)을 찬찬히 검토하면서, 아이들의 실종은 중세인의 힘겨운 삶 중에 일어난 어린이들에 대한 재난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전설의 성립과 변화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중세의 평범한 도시민들의 삶에 돋보기를 들이대는데, 그 과정이 자뭇 흥미진진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이야기는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 이야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랑 악사에 대한 멸시, 쥐 사냥꾼에 대한 전설, 양극화되는 사회에서 부자들만을 대변하는 시(市) 참사회에 대한 불만 등이 뒤섞여 지금의 전설로 재탄생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전설은 어떠한 역사적 기록보다 생생한 중세 시대의 스냅샷일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오랜 전설의 뒤편에 가려진 중세인들의 삶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조약돌같은 동화가 보석과 같은 골동품으로 바뀌는 체험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필자처럼 전쟁사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중세의 전장에서 민병대의 대열을 지켰던 도시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 아베 긴야는 중세사 연구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만, 저작은 이번에 처음 읽어 봤습니다. 중세 동독일의 식민 운동이 연구 주제라고 하네요. 이는 제가 좋아하는 튜튼 기사단의 역사와도 연관이 깊기에, 우리 나라에 번역된 저작을 좀 더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 <88만원 세대>는 2007년 8월에 출판되었다.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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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고어핀드 2008/04/22 01:01

    지난 주 홍콩으로 연수를 갔다가 토요일 저녁에 귀국했습니다. 앞으로 포스팅을 하는 사이사이 연수중 들른 마카오에 대한 여행기가 올라갈 것 같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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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앨런비 2008/04/22 09:20

    대략 동독 식민설은 저도 익숙한 설인데 말입니다 ㅡ.ㅡ;;;
    징기스칸4를 예전에 에딧 플레이(....)를 할 때 이 이벤트가 발생해서 쵸큼 놀랬던 기억이...;;
    물론 대환제국을 복원했지만 미처 유럽에 손을 못끼친 고려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말입니다(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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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어핀드 2008/04/23 00:23

      오, 칭기즈칸에 그런 이벤트가 있었군요. 저는 몽골하고 아이유브 왕조로만 엔딩을 봐서 그 이벤트를 못 봤답니다.

  3. 민지홍일까 2008/04/22 15:45

    아무래도 역사의 주인공만 인식하고 그외 사람들은 엑스트라일뿐이라는 인식은

    옛날부터 소설, 설화 등등으로도 있었고

    요즘은 만화(-희생은 싫다면서 상대방을 마막 죽이는 건x시드 라든지..)

    게임(마린은 다시 뽑으면 되니까요!) 등등으로

    좀 많이 커졌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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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어핀드 2008/04/23 00:24

      그런 게 결국은 파시즘의 뿌리가 된다능. 그러 정말 위험하다능. 그렇다능.

    • 朴下史湯 2008/04/23 20:55

      만화 '짬'으로 유명한 주호민 작가가 그린 만화 중에
      스타크래프트의 마린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가 있지요.
      주호민 작가님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을 테니 한 번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민지홍일까 2008/04/23 23:26

      그거 이미 봤습죠[...]

      어쨌든 엑스트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게임은 없는거려나..?

  4. 한베에 2008/04/23 15:48

    마카오 여행기 기대하겠습니다.


    맛난 음식 드신 이야기도 해주세영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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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어핀드 2008/04/25 17:46

      ㄳㄳ. 지금 열심히 작성 중입니다.

      그런데 음식 이야기는 기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저 대충대충 먹고 다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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