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이 보여 주는 재미있는 속성들 중 하나는 바로 "사물이 가진 맥락을 기억한다." 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할 때 책에 글자가 인쇄된 모습을 기억하지 않고, 읽은 문자들의 의미를 기억한다. 책의 내용을 해독할 수 없으면 기억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원리는 다른 곳에도 적용된다. 사람은 사물이나 사건 그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얽힌 맥락을 기억하게 된다. 특정한 사건에 맥락을 부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특정한 부분은 축소하거나 삭제하고 특정 부분은 과장되면서 인과 관계를 만들면 이야기가 된다. 아래의 심리학자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야기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같이 소설을 쓴다. 어떤 문화권에서나 상대방을 파악할 때 '첫인상'을 중시하는데, 이 첫인상은 따지고 보면 매일 쓰는 소설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얼굴 생김이나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그가 어떤 성격일지, 머리는 좋을지, 직업은 뭐고 여기는 왜 왔을지, 지금 기분은 어떨지 등에 관한 짧은 소설을 쓴다. 그리고 우리 기억에 남는 건 실제 그 사람의 외모나 언행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본 순간 머리에 떠올랐던 그 짧은 소설이다. (중략) 정리하면, 우리는 언제나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야기의 형식으로 바꿔서 받아들인다.사람에 대한 인상만 그런 게 아니다. 이 이론은 <기동전사 건담> 같은 애니메이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건담 매니아들은 우주세기 연표를 줄줄 외우는 등 건담 세계관에 심취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그 세계관으로의 입구 역할을 하는 건 결국 이야기이다.- 장근영, <싸이코 짱가의 영화 속 심리학>,메가트렌드, 2007, pp.73-75

'그분' 전용이다...
오오츠카 에이지大塚英志는 '작은 이야기'라는 말을 특정한 작품 속에 있는 특정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고 있다. 이와는 달리 '커다란 이야기'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지탱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는 '설정' 이나 '세계관' 을 의미한다.2.
그리고 오오츠카에 따르면 오타쿠계 문화에서 개개의 작품은 그 '커다란 이야기'의 입구로서 기능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소비자가 진정으로 평가하고 구매하는 것은 설정이나 세계관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설정이나 세계관을 그대로 작품으로 팔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실제 상품은 '커다란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그 단편인 '작은 이야기' 가 겉보기 상품으로 팔리는 이중전략이 유효하게 된다. 오오츠카는 이 상황을 '이야기 소비' 라고 했다.- 東浩紀, <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オタクから見た日本社会>, 講談社, 2001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pp.67
흔히들 토탈 워 - 고어핀드 군이 大열광하는 전략 게임 - 의 매력 혹은 특징으로 수천 명의 병사들이 달려나와 벌이는 초대형 전투씬을 든다. 실제로 게이머들이 토탈 워의 게임화면을 한 번만 보여 주면 당장 눈앞에 남는 것이 그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약간 다른 측면에서의 매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바로 토탈 워의 유닛들에 대해서다.
토탈 워 시리즈는 2번째 작품 <medieval:total war> 이후 하나의 전통을 이어내려오고 있는데, 바로 유닛과 건물 하나하나에 작은 이야기를 붙인다는 것이다. 사실 전략 게임에서 유닛은 수도 없이 뽑고 죽이는 소모품이고, 이야기 따위를 갖다 붙인다고 해서 그 기능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토탈 워의 유닛들 중 상당수는 껍데기만 다를 뿐 실제로는 동일한 유닛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 게임을 해 보면, 그 별 것 아닌 이야기가 게임 속 세계에 물입도를 크게 높여 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임의 고증이 훌륭하다는 점1도 있지만, 무엇보다 유닛들에 붙은 작은 이야기와 사연들이 중세 시대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는 덕분이다. 앞서 인용한 오오츠카 에이지 식으로 표현하자면, 유닛과 건물에 붙은 작은 이야기들은 중세 시대로의 입구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놓고 보면, 토탈 워가 중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해 안달이 난 전세계의 역사 덕후(-_-;)들을 열광케 하는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아르메니아 기병. 투르크 족의 발흥에 의해 서쪽으로 쫓겨 온 동방 기독교인들의 후손들이다. 중동 지역에서 용병으로 고용할 수 있다.

Baldur’s Gate II: Shadows of Amn 의 아이템, Boots of North. 냉기 방어력을 올려 준다.
3.
최근 회사 분들의 꼬임에 넘어가 wow를 다시 시작했다. 타우렌 전사를 키우고 있는데,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wow 작은 이야기들이 정말 잘 짜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 자체도 꽤나 재미있게 만들어져 있지만, 그 '작은 이야기' 들이 warcraft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는 점도 인상깊다.

붉은 깃털 세레나를 죽이는 퀘스트. 호드 퀘스트이며, 크로스로드에서 받을 수 있다.
닉네임 자체를 warcraft2의 캐릭터에서 따온 만큼, 나는 warcraft 시리즈의 패키지를 전부 가지고 있다. 이따금 옛날 시리즈의 매뉴얼을 펼쳐 보곤 하는데, 그러다보면 그 옛날 시리즈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도 Azeroth와 Draenor의 세계관을 담고자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warcraft2 때만 해도 그저 색상에 불과했던 인간 연합의 여러 나라들과 호드의 부족들, 조악한 2D 그래픽으로 표시되던 작은 유닛들... 이들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이야기를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힘든 작업임이 틀림없지만, 어쨌든 결과물이 나와 있는 걸 보면 약간은 놀랍기까지 하다.
warcraft의 세계관이 우리나라에서는 wow가 출시된 비교적 최근에 급속히 퍼졌지만2, 블리자드는 mmorpg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부터 조용히 워크래프트의 세계world of warcraft를 준비해 오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걸 볼 때면, 나는 작은 이야기의 커다란 힘을 여실히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