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업에 바쁜 나머지 이미 지나가버린 이슈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허전해서 일단 포스팅합니다.

설 연휴 직전, 케이블 Tv에서 영화 축약판을 보다가 눈이 퍼뜩 띄었습니다. 바로 아래 장면입니다.

조조군 기병들이 상당히 재미있는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조그만 쇠미늘으로 투구를 만들어서 손을 대면 달그락거릴 것 같네요. 생긴 것도 재미있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점입니다: 이 투구는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보이는 투구거든요.

관모형 소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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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찰주 복원품.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영화 속에 나온 것과 같은 투구를 소찰주(小札胄)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작은(小) 미늘 철판(札)을 수십 개를 가죽끈 등으로 연결해서 만든 투구(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투구 정수리 부분이 비어 있어서 그 위에 관모(冠帽)처럼 생긴(形) 장식을 착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관모형 소찰주(冠帽形小札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장식성이 강한 투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상당수가 철판 위에 금동을 입힌 형태로 발견됩니다. 어지간한 고위 무사가 아니면 착용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출처 특징
경상남도 합천 반계제 고분군 금동장 + 철제
경상남도 합천 옥전 철제
경상남도 고성 송학동 금동장 + 철제
경상북도 경산 임당 고분군
(전) 부산광역시 연산동 철제
(전) 경상남도 창녕군 금동장 + 철제 (관모 장식만 남아 있음)

관모형 소찰주 유물 현황

이 투구가 또 재미있는 것은, 그 계보가 묘연하다는 점입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투구가 나오는 시기는 5세기 후반의 고분에 집중됩니다. 이 시기쯤 쓰였다는 얘기죠.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투구가 흡사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 마냥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양의 투구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합천 고분군에서 이 투구가 나왔을 때 발굴자 분들도 꽤나 당황했을 듯합니다.

굳이 비슷한 형식의 투구를 들자면, 중국 하북성河北省 연하도燕下都 44번 고분에서 나온 투구1 정도가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 고분이 전국시대 후기의 고분이라는 것. BC 221년, 진나라의 천하 통일로 중국의 전국시대는 끝을 맺었으니까...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투구와는 못해도 700년간의 공백이 비어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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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시대의 소찰주. 2010년 3월, National Geographic Museum 특별전시회(Terra Cotta Warriors: Guardians of China's First Emperor). (출처: flickr@kevharb)

전국 시대 후기에 중국 변방에서나 보이던 투구가 어떻게 700년 뒤 갑자기 한반도에 나타났는지, 그 내역은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이러한 형식의 투구는 이 투구 한 점 뿐입니다. 한족이 처음으로 만든 것인지, 북방 기마 민족이 먼저 사용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투구인 셈입니다. (이런 투구를 가져다 영화 소품으로 사용한 제작진의 눈썰미도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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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반계제 출토 관모형 소찰주.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제가 참고한 논문을 쓴 신경철 교수의 경우 "중국과 교역이 많았던 백제를 통해 소찰주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가야 근처까지 흘러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설을 주장하시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설이 가장 그럴 듯 해 보입니다. 현재까지 나온 투구들은 대략 5세기 말 가야 지역에서 나온 것들인데, 실제로 이 시기 가야는 백제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칼이나 방패, 등자 등의 전쟁 도구에서 비슷한 것들이 자주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형식의 투구가 중국(남조) → 백제 → 가야의 순서로 전파되었다면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부여에서 나왔다는 금동 소찰주도 한 점 전해지거든요.

이따금 백제와 대가야의 장성들이 모여서 신라와의 전쟁 계획을 의논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아마, 너도나도 소찰주를 써서 투구만 봐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 같네요.

참고문헌

  • 『삼국시대 철제갑주의 연구: 영남지역 출토품을 중심으로』, 송계현, 1988
  • 『』, 신경철, 1989
  • 『한국 고대 갑옷과 투구의 연구』, 장경숙, 2005

ps) 영화를 보다 보니 이런저런 갑옷이 많이 보이네요. 조조군 간부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통수개로 보이는데, 이 갑옷은 삼국 시대 때 실제로 쓰인 갑옷이니 맞다고 해야겠지요. 조자룡과 장비는 경번갑을, 관우는 어린갑을 입고 있네요. 중국의 갑옷에 대해서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스치듯 본 인상으로는 우리나라 사극보다 고증면에서는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1. 실제로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찰주가 발견되었을 때, 이 투구를 참고로 해서 복원을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