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 지휘자 강마에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불러 모은다. 한 명씩 묻는다. "왜 오케스트라 안 들어갔어요?" 대답은 제각각이다. "나이가 드니 받아 주는 데가 없어서..." "불러 주는 데가 없어서..." "아픈 아버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해서..." 여기에 대한 강마에의 대답은, 딱 한 가지다. "핑계입니다."
2.
드라마를 보다가, 이 대목에서 뜨끔했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뭔가 일을 미루는 걸 아주 싫어해서, 밀린 일을 해치우기 위해 밤을 새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나름 미룸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야무진 착각이었다. 내가 사태를 파악한 건 올해 1월이었다. 그 시점에서 대충 계산해보니 그 일을 미루고 팽개쳐 둔 지가 무려 3년이 다 되어 있었다.
사태가 그 모양이 된 건, 순전히 내 탓이다. 내가 그 일을 미룬 것이다. 물론 미룰 때에는 미룬다는 생각은 안 했다. 경험이 모자라서 그게 내 일인지도 몰랐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해본 적이 없어서, 손해볼 것 같아서, 핑계를 대고 "난 안 될 거야." 라며 이불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었던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3.
강마에는 단 한 마디로 단원들의 이러저러한 사정들을 핑계로 치부해 버렸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노력한다고 해서 생물학적인 나이가 오케스트라 들어갈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땅을 판다고 해서 아버지 치료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진짜 안 되는 건 뭘 해도 안 되는 법이다. 음악을 하지 못하게 된 단원들의 사정은 대부분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강마에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되려 아주 적절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못 하는 게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내가 했던 것처럼 핑계를 대고 도망가는 거다. 날고 기는 프로 연주자들에도 만족을 못 하는 강마에는 실력도 엉망진창인 아마추어 단원들을 이끌고 공연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마당에 핑계를 대고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가 벌어지는 일은 안 봐도 뻔하다.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될 것도 안된다.
4.
선배 결혼식 참석차 제주도에 내려와 있다. 여관방에 앉아서 노트북을 펼치니, 그 선배가 결혼하기까지 있었던 일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쉽지 않은 결혼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진 경위도 대략 파란만장했다. 역경이 닥칠 때마다 그 선배가 핑계를 대고 도망갔더라면, 오늘같은 날은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배는 도망가지 않았고, 이제 아홉 시간 뒤면 식을 올리게 된다.

언제나 터프한 가르침을 내리시는 선배님과

고어핀드 군을 구박하는 그의 처

그들에 대한 총평
5.
나도 빨리 마무리를 짓든지 해야겠다. 싸움이 날지 친구 하나를 잃어버릴지 모르는 일이지만, 더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 휘는 것보다 부러지는 게 낫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