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야기

CRITIQUE by 고어핀드 2009/09/04 22:13
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 William Shakespeare, As You Like It, 1600
1.

한 여인이 살인죄로 체포된다. 한 남자를 살해한 죄였다. 그녀는 스타가 되고 싶었고, 남자는 나이트 클럽의 사장과 절친한 사이라는 점을 미끼로 그녀를 농락했다. 사실, 그는 나이트 클럽 사장하고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격분한 그녀는 남자를 쏴 죽이고 만다.

뮤지컬 영화 <시카고(2002)>의 내용이다. 하지만 그녀의 변호사는 능수능란한 언론 플레이로 그녀를 구해 낸다. 그는 가짜 일기장까지 만들어 가면서 자기 고객을 "어쩌다 타락하게 된 순진한 배우 지망생" 으로 포장한다. 법정에서는 앞으로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게 한다. 장대한 도덕극에 여론은 열광하고, 그녀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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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both reached for the gun~♬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별 거 없었다. 변호사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연출했을 뿐이다. 그 다음은 열광한 여론이 알아서 했다. 구치소의 여간수는 이 한 마디로 사건을 정리한다. "이 도시에서 살인이란 쇼에 불과해."

2.

영화 속의 이야기일 뿐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작년에 있었던 미네르바 사건을 떠올려보자. 흔히 간과하는 것이지만, 이 사건의 분수령은 readme라는 이였다. 모두가 미네르바의 정체를 궁금해할 때 그는 아고라에 글을 하나 올렸다. "나는 미네르바의 정체를 안다. 그는 대한민국 재계의 유명인이며,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1% 상위층 중의 상위에 속하는 0.1% 극상위층이다." 이 글은 순식간에 6만 명 이상이 봤고, 언론 기사를 탔다. 50대 이상, 해외 체류 경험이 있을 뿐이라던 미네르바의 캐릭터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살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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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lickr.com/photos/monkeyc/165230047/

현실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글을 사람들은 믿었고 언론사들은 보도하느라 바빴1다. 왜 그랬을까? 그건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미네르바 현상의 배경은 지배 계급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다. 이런 환경에서 미네르바의 이야기는 꽤나 매력적2이다: "이기적이고 부패한 한국의 엘리트들은 경제 위기의 본질을 숨기고 있다. 그들은 백성들이 죽어나가든 말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얼굴을 숨긴 최고 극상류층 엘리트가 우리 대중들을 위해 천기를 누설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미네르바가 "우리 편"이라고 믿었다. 그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도 정부의 음모라고, 잡힌 미네르바는 가짜라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믿고 싶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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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 놈(2008)>

이런 식으로 놓고 보면 미네르바 현상은 경제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서부극의 한 장면에 가깝다: "약한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최고의 총잡이가 조직을 배신하고 달려왔다." 그만큼 사람들이 이야기에 굶주려 있다는 증거이리라. 이 나라에서 경제 예측이란 쇼에 불과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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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log.yahoo.com/psy_jjanga/1455645

이유는 알 길 없지만,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가며 믿고 싶어할 만큼 이야기에 굶주린 동물이 인간인 것 은 확실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야기 붙이기는 갈수록 큰 돈이 되는 산업이 되어간다. 연예계, 산업계, 정치계 할 것 없다. 너도나도 자기가 팔아먹는 물건(이나 사람)에 이야기를 붙이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렇게 붙는 이야기의 과연 몇 %가 진실일지 궁금하다.

4.

"장미꽃 부케 들고 남편과 입맞춤" 故장진영 감동의 러브 스토리
‘영화같은 사랑, 영화같은 결혼’ …장진영 임종 두달전 연인 김씨와 극비 결혼
故장진영, '남편과의 커플링'
故장진영 영정사진, 아버지 편지에 ‘털썩’ 떨어져

오늘, 배우 장진영이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녀가 남긴 애절한 순애보가 장안의 화제다. 배우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여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마지막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가짜 이야기들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그녀의 진짜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두 개의 삶을 완성했다: 사랑받는 한 여인으로서, 환상을 보여 주는 배우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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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청연(靑燕, 2005)>

나는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만은, 저 너머에도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다. 가면서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겨 준 장진영. 그녀가 못 다한 사랑을 마저 누리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저 세상에서라도, 다음 세상에서라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운 그대는 꿈에서나 볼 수 있는데
내가 임을 찾아가니, 임은 나를 찾아 떠났네요.
바라건대 다른 날 꿈에서는 한시에 출발해
오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기를.

- 황진이(재인용 출처)

  1.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보도한다. 그래야 팔리기 때문이다. 신동아가 가짜 미네르바 인터뷰를 특집으로 다뤘던 것을 기억하라. [본문]
  2.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이러한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논하고 있는 비평도 있다. "한국 사회의 대중이 열망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해방적 부르주아’이다. 강마에의 캐릭터는 이런 열망에 조응하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본문]
2009/09/04 22:13 2009/09/04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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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 "진짜" 이야기 Fetter 2009/09/17 07:25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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