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칼에 열광하는가

CRITIQUE by 고어핀드 2009/09/14 22:50
1.

"그런 취미 있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아가씨와 함께 밥을 먹다가 들은 얘기다. 확실히 내 취향은 흔치 않다. 남자들 중 밀리터리 취미를 가진 사람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칼이나 갑옷 같은 전근대의 병장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희귀하다. 그래서인지 왜 그런 걸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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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의 코등이(츠바). 대나무 잎과 눈송이가 새겨져 있다. 살생의 도구에 걸맞지 않은 평화로운 이미지다. http://www.flickr.com/photos/churl/97863027/

egoing 님의 포스트를 읽다가 몇달 전 봉추찜닭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보면 확실히 밀리터리는 야동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이유는 있을 게다. 나는 왜 살상의 도구를 좋아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

2.

"이것은 생명의 거대한 드라마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것과 싸워야 되는 거에요. 그런 싸움은 선악이나 도덕을 초월한 것이지요. 생명을 가진 것들이 수 억만년의 시간 속에서 멸망하고 도태하고 다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아주 장엄한 문장으로 썼어요. 문장이 훌륭합니다."

김훈이 네이버와의 인터뷰에서 <종의 기원>을 추천하면서 남긴 말이다. 이 정도면 답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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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lickr.com/photos/max_westby/430641017/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나는 생명을 살상하는 도구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본다. 병장기는 살생의 도구다. 빠르고 정확하게 상대를 살상하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이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이들은 세상 어떠한 물건보다 더 숨가쁜 진화와 적응을 거치게 되었다. 과장 좀 보태서, 전세계의 수많은 병장기 중에 똑같은 건 하나도 없다. 5분 뒤에 만들어진 것은 그 전에 만들어진 것보다 5분만큼 더 진화한다. 병장기란, 그런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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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시대의 타치(太刀). 말 위에서 적을 내려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구니요시 작. http://www.flickr.com/photos/peterjr1961/3571828659/

덕분에 병장기는 인간의 창조물 중 가장 인간의 모습을 닮은 도구가 되었다: 끊임없는 진화의 결과물. 호모 사피엔스 종(種) 자체도 진화의 결과물이지만, 인간의 창조물들 또한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인간의 도구/사상/사회 구조 중 환경 적응의 결과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칼몸이 뿌리는 은빛을 볼 때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는 느낌을 받곤 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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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 Wolf. http://www.flickr.com/photos/dobak/119671566/

생명이 넘치는 것은 아름답다. 진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생명력 분출의 극한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선과 악 따위의 찌질한 가치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이는 또한 수컷 특유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동물의 수컷은 대개 암컷보다 더 아름다운데1, 나는 이것이 수컷 특유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컷은 조금이라도 시원찮으면 살아남아 유전자를 남길 수 없다. 수컷이 가진 아름다움이란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의 부산물이다: 거대한 뿔. 강인한 발톱. 날카로운 송곳니.

내가 병장기를 대하는 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무기는 끊임없는 진화의 결과물이고, 생명력의 발현이다. 그래서 나는 예리한 칼날에서 끓어오르는 인간의 에너지를 본다. 거대한 인간의 드라마를 본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병장기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쇠붙이 안에 가둬 놓은 작은 우주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 점을 좋아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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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lickr.com/photos/54013486@N00/2716491091/

이쯤 되고 보면 궁금해진다. 무기 진화의 궁극은 최첨단 무기들일 텐데, 정작 난 거기에 별 흥미가 없다. 그 이유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너무 발달한 탓에 잘 와닿지가 않아서2 그런 걸까. 아니면 내 클래식한 미감 때문인가.

한줄요약: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1. 딱 하나 예외가 있긴 하다. 인간. [본문]
  2. 충분히 발달한 무기란 무기라기보다 마법일지도? [본문]
2009/09/14 22:50 2009/09/14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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