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우라 켄타로三浦 建太郎, <베르세르크ベルセルク> 제 3권 중에서.
국왕이 동원한 군대가 주류를 이룬 동아시아 사회와는 달리, 중세 유럽에서는 이런 폭력 서비스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동서양 사회체제의 특징에서 비롯됩니다.
봉건식 전쟁 방식
중세(the middle age)라는 시기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봉건 제도(feudal system)를 근간으로 하는 시대입니다.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기사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지만, 이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9~10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이 와해되면서 유럽 전토는 다시 한 번 난세로 접어들게 됩니다. 왕국 곳곳에서는 내전이 계속되었으며 외부의 침략자들2은 끊임없이 유럽을 괴롭혔습니다. 백성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기사의 보호가 필요한 반면, 기사들은 비싼 말과 무구(武具)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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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이야기하자면, 봉건 제도란 전쟁을 위한 비용을 사회 전체가 분담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 제도의 군사적 한계
하지만 이러한 봉건적 군사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수비에 최적화된 시스템인 만큼, 반대로 공격이 힘들다는 것이죠.
봉신이 군주에게 지는 군사적 의무에는 성채에서 수비대로 복무할 것, 주군이 공격당했을 때 전쟁에 참여할 것, 각종 부조에 참여할 것, 원정에 동행할 것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봉신이 자기 비용으로 종군하는 기간은 40일3에 불과한 데다가 어디어디까지만 참전한다는 류의 계약 조건이 세세하게 붙어 있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원정이 제대로 수행될 리가 없지요.
봉건 제도의 군사적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는 바로 노르망디 공국입니다. 1066년 1월 잉글랜드의 국왕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왕위를 주장한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이미 왕위를 물려받은 해롤드 2세와 다툼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1066년 9월, 기욤이 이끄는 군대는 잉글랜드에 상륙, 해롤드와 전면전에 들어갑니다.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훗날의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 http://en.wikipedia.org/wiki/File:William_the_Conqueror_invades_England.jpg
병역의 금납화
이러한 현실에 대한 가장 쉬운 해결책은, 봉신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불하고 의무 기간 이상의 군복무를 시키는 것입니다. 봉신들 또한 돈이 필요했던 만큼, 이렇게 "아르바이트" 를 뛰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자기 직속 군주뿐만 아니라 다른 군주와도 계약을 맺어서 돈을 벌었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기사들 입장에서는 의무 소집은 이런저런 군주들에게 고용되어 돈벌이를 하는데 귀찮은 일이 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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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세 유럽에서 전쟁 서비스를 돈으로 사고파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용병 시스템의 본격적인 등장은 14세기 이후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부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