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낙에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만큼, 영화가 가진 현실적인 함의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더군요. 특히 자주 이야기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인 것 같습니다. 영화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혹은 이라크 전쟁을 모티프로 차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실제로 미국 보수층에서는 이 영화를 반미 영화라며 비판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러한 비평은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영화 포함)이 현실에서 뚝 떨어져서 존재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디언1들의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이 영화는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 영화지만요.
명백한 운명: 인디언들의 재앙
흔히들 미국을 최초의 근대 국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미국의 건국이 계몽 사상에 기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근대 이전의 국가들은 신이 국왕에게 부여한 권리에서 통치의 적법성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인간의 이성을 신뢰한 계몽 사상은 국가의 적법성이 피지배되는 국민들의 이성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따르면 국왕이 국민들의 뜻에 반하여 권력을 휘두를 경우, 국민들은 이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독립은 이러한 생각에 기반해서 이루어졌고, 독립 선언서에도 잘 나타나 있지요.
Governments are instituted among Men, deriving their just powers from the consent of the governed, ...
정부의 정당성은 피통치자의 동의에 의해 유래하며...
- 미국 독립 선언서, 1776.7.4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는 13주의 대표들.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Declaration_independence.jpg
북미 대륙 전체에 자유를 확대하는 것은 신이 우리(백인)에게 맡긴 책무이다. 따라서 대륙 전체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우리의 명백한 운명에 따른 권리이다. [출처]배경이야 다분히 경제적인 것이었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러한 표어는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학살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이성에 근거한다는 생각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성이 없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도 되거든요. 실제로 인디언들은 이성 - 혹은 과학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지배했던 것은 자연 모든 곳에 영혼이 있고 또 이들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범신론적 · 순환론적 사고였습니다. 그러니 명백한 운명 운운은 결과적으로 인디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버린 셈이 되어버립니다.
본격적인 인디언 말살은 1830년 5월 26일,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인디언 제거법"에 서명하면서 시작됩니다.2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고 있던 인디언 부족들을 서부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 이 법의 내용이었는데, 당연히 그 집행은 그리 점잖치 못았습니다. 특히 체로키 족이 쫓겨갔던 길은 지금도 눈물의 길이라고 불리고 있을 정도니까요. 이후 남북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서부 개척의 시대가 열리면서, 인디언들은 착실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수우족 추장 시팅불(1831~1890)을 찍은 사진. 시팅불은 미국 기병대에 저항한 가장 유명한 인디언 추장이다. http://en.wikipedia.org/wiki/File:Chief_sitting_bull.JPG
세계 평화를 위한 최선의 희망은 전세계로 자유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 세계의 폭정을 종식시킨다는 궁극적인 목표로 민주주의 운동과 제도의 성장을 추구하고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
- George W. Bush, <2기 취임 연설문>4
영화에 그려진 인디언의 이미지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대중 문화에도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흔히 미국적 가치를 가장 잘 반영했다고 불리는 것들은 서부극인데, 이 영화들에서 인디언들이 어떤 식으로 다뤄졌는지는 아마 설명이 필요없을 겁니다 - 예, 말 그대로 악역이었죠. 그것도 10원짜리 단역.
1970년 개봉된 <솔져 블루Soldier Blue>는 인디언의 눈에서 서부 개척을 바라본 최초의 영화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데는 시대적인 변화도 한 몫 했습니다. 60년대 이후 사람들은 기존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이성적 합리성에 의심5을 품기 시작거든요. 환경 파괴나 베트남 전쟁의 수렁 같은 데 염증6을 느꼈기 때문인데, 어쨌든 그 과정에서 인디언들의 문화는 관심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뭐, 여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난 인디언 저항 운동도 한 몫 했을 겁니다.

<늑대와 춤을(1990)>
그런데 <아바타>를 보다 보니... 오히려 이 영화가 딱 그 범주에 들어가더군요.

- 정확히 말하면 북미 원주민Native American이 맞지만, 한국에서는 흔히 인디언으로 통칭되므로 이 글에서는 인디언으로 쓰도록 한다. [본문]
- 아이러니컬하게도, 앤드류 잭슨은 미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룬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본문]
- 텍사스 병합, 쿠바 침공, 필리핀 병합 등등. [본문]
- 위 번역문은 여기에서 가져왔다. 영어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본문]
- 다음 항목 참조: 히피 문화, 네오샤머니즘 운동 [본문]
- 실제로 솔져 블루는 1864년의 샌드 크릭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마침 개봉된 시기가 마이 라이 학살사건 폭로 직후였기 때문에 더 큰 논쟁을 불렀다. [본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