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전설과 아서왕 전설은 잘 알려진 전설이다.

하지만, 과연 이 전설들이 "옛날부터 내려온" 것들일까?

최근 판타지 붐이 일면서 신화나 전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흔히 "옛날 이야기" 라고 부르는 것들 말이다. 두산 백과사전에 따르면, 전설이란 "민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 다. 어느 쪽이건, 옛날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라는 인상이 강하다. 실제로 전설은 대개 옛날에 만들어진 이야기, 혹은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흡혈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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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리니의 은 전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뒤집는 책이다. 뱀파이어는 삼척동자도 알 만큼 유명한 이야기인 만큼, 그 배경에 대해서도 상당히 알려져 있다. 뱀파이어의 출전이 브램 스토커의 소설 라는 것 정도는 너무 잘 알려져 있어 상식 축에도 못 든다. 역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드라큘라 백작은 중세 루마니아에 실존했던 잔혹한 영주 이름이라는 것 정도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쪽짜리 진실, 아니,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뱀파이어 전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기원을 갖는다. 이 책은 피가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피는 인간에게 있어 생명의 정수다. 그런 만큼 피에 대한 종교적 관념(혹은 피를 마시는 귀신의 전설)은 세계적으로 일반적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유대교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 둔다. 너희는 어떤 생물의 피도 먹지 마라. 피는 곧 모든 생물의 생명이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겨레 가운데서 추방하리라." (레위기, 17:14)

유대교의 피에 대한 관념은 유대교를 계승한 기독교로 이어지고, 다시 중세 유럽으로 전해진다. 11세기에 이르면 밤이 되면 무덤에서 나와 산 자의 피를 빨아먹는 시체들에 대한 전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전설들은 중세 사회를 휩쓴 흑사병이나 늑대인간의 전설, 잔혹한 봉건 영주들에 대한 기억과 결합하면서 서서히 지금의 뱀파이어 이야기의 골격이 갖춰져 가기 시작한다.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게 되는 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의 "전설"이 의외로 오래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뱀파이어의 특징들 - 밤이 되면 돌아다니고, 십자가와 마늘을 무서워하며, 희생자 역시 흡혈귀가 된다 - 이 만들어진 것은 18세기에 불과하다. 흔히 뱀파이어를 박쥐와 많이 결부시키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박물학자가 가축의 피를 빨아먹는 중남미의 박쥐에게 흡혈박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거꾸로 뱀파이어의 이미지에 달라붙은 것이다.

뱀파이어를 다룬 최초의 영화, Nosferatu(1922)

심지어 일반적인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1931년 개봉된 영화 Dracula>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채 백 년도 되지 않은 셈이다. 이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던 데도 배경이 있다. 1929년 월가의 주가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수백만 명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사람들이 몇 푼의 돈으로 즐길 만한 오락은 영화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많은 미국의 대중문화 작품들이 뱀파이어를 다루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패자가 된 미국의 문화가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비로소 뱀파이어는 전세계적으로 퍼진 신화가 된다.

의 한 장면. 드라큘라 역은 헝가리 배우 벨라 루고시(Bela Lugosi)가 맡았다.

이 책은 뱀파이어 전설의 이면을 다루면서 두 가지 묵직한 시사점을 던진다. 하나는 이야기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반영이며, 이것은 전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신화나 전설은 오랜 시간을 거쳐 내려오는 만큼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될 여지가 많다. 자연히 그 모습은 처음 등장했을 때에 비해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띤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전설이란 옛날부터 내려왔다기 보다 옛날부터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하는 게 더 바람직할 듯하다.

또 하나는 우리가 흔히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상당수는 지극히 최근에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 뱀파이어 전설의 기원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의 뱀파이어에 대한 이미지는 대개 영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적 잔머리의 산물, 아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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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치면, 역시 영국에서 기원한 아서왕 전설도 빠지지 않는다. 안 베르톨로트의 은 풍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아서왕의 전설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영화 등의 대중문화에서 흔히 아서왕은 기사도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조금만 역사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색슨 족의 침략에 맞서 싸운 로마 군 장군이 아서의 원형이라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2004년 개봉한 영화 King Arthur가 이 설정을 차용했다.) 하지만 지금의 전설이 만들어진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게다가 그 상당 부분은 정치적 잔머리의 혐의가 짙다.

아서왕의 전설이 고대 영국(브리튼 섬)에 거주했던 브리튼 족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다. 5세기에 이르면 로마의 보호에서 벗어난 브리튼 족은 색슨 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는데, 몇몇 문헌 기록들은 이 때 활약한 어느 왕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을 전한다. 한 때 브리튼 섬의 왕이었으며 언젠가 다시 돌아와 왕이 될 거라는 아더의 전설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전설이 지금의 골격을 갖춘 것은 12세기 말의 일이다. 브리튼 족을 정복한 색슨 족을 다시 정복하고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된 노르만 족에게 아더의 전설이란 매력적인 도구였다. 색슨 족과 사이가 나쁜 브리튼 족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노르만 족 국왕을 "위대한 국왕 아더의 후계자" 로 포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아더에 대한 단편적인 전설은 정리되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서의 틀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나 봉건 제도 등 당대의 사회를 이루던 요소들이 이야기의 부분부분으로 자리잡으면서 하나의 세계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액스칼리버를 호수에 던지는 베디비어. 아더왕 전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대영 박물관 소장. (본서 61쪽에서 재인용.)

아더왕 전설을 다루고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중세의 사회상에 대해 폭넓은 시각을 제공하는 재미있는 책이다. 현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아더왕에 대한 작품들에 대해서도 소개하는 만큼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필자는 아더왕 전설에도 요즘 영화처럼 프리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 흡혈귀에 대한 영화의 스크린샷은 여기서 가져왔다. 저작권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출처를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