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폭군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진시황은 업적이 참 많은 사람이다. 그의 업적은 서른 아홉의 나이에 중국을 통일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마다 서로 다르던 문자1와 도량형을 통일한 것이 진시황이다. 무엇보다 전국을 잇는 도로를 건설하고 군현제라는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시켰다. 이 제도가 훗날 중국의 통일 왕조들에게 한결같이 채택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흔히 나쁜 군주의 표본으로 여기는, "주색에 빠져 국정에 소홀한" 사람도 아니다. 하루에 30kg의 서류2를 읽고 결재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다. 그뿐인가. 당대의 일류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학식도 있고,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는 신하들에게 토론을 하도록 한 다음에 결정할 정도로 합리적인 면도 있다. 반면, 진시황의 잔인함을 설명하는 기록들은 상당수가 그 진실성을 의심받기까지 한다. 억지로 지어낸 듯한 흔적이 많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진시황은 흔히 말하는 폭군의 이미지와는 꽤나 동떨어진 사람이다 - 그가 현대로 오면서 오히려 재평가받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진시황의 팬 중 한 사람이었다. 최근 김태권님의 『한나라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의 또다른 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다 읽고 두 가지로 놀랐다. 하나는 내가 아는 것 이상의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했다는 점이다. 진시황은 폭군이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황제

진시황이 하는 행동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비범한 능력과 초인적 성실성을 보여 준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전혀 헤아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진시황이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다. 권세가 센 신하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자살을 하였는데, 진시황은 그의 장례식에서 울음을 터트린 사람을 모두 잡아서 죽인다3. 높은 대신이라면 후원해준 사람도 많고 은혜를 베푼 사람도 많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이 죽었다면 눈물을 쏟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진시황 눈에는 그게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덤벼들 잠재적 암살자"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병마용갱의 토용. (출처: flickr@kevharb)

매사가 이런 식이다. 그에게 남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다. 천하를 통일할 때도 그랬다. "각국의 주요 인물에게 돈을 주어 구워삶고,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자객을 보내 죽이며, 마침내 군대를 보내 멸망시킨다." 진시황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원한과 공포를 만들었는지 알까? 아니,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을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진시황은 더 큰 공포로 그들을 억눌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감의 상당 부분은 그 공포감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쥐가 고양이를 무는 때는 궁지에 몰렸을 때 뿐이다.

출처: flickr@ehrgeizier

틀림없이 진시황은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성실은 대체로 좋은 가치지만, 이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성실이란 거꾸로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모질다는 이야기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이 그 모짊의 잣대를 남에게 들이대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설명이 필요할까? 더 무서운 건, 이 사람이 비범한 능력의 보유자라는 거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아직 신입생이던 시절, 나는 논어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 한 학기가 지나간 뒤, 교수님은 이렇게 강의를 정리하셨다. "인의예지의 기본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보다 공부를 잘 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 학생들이 타인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명심하십시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지식은 흉기밖에 안 됩니다."

진나라 시대의 무게추. 진시황은 지역별로 달랐던 길이와 무게 등의 도량형을 통일했다. (출처: flickr@ehrgeizier)

학점이야 썩 좋았지만, 그 때 나는 교수님 말씀에 시큰둥했다. '저렇게 물러터진 생각을 하다 일본에 나라를 뺐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 말이 참으로 옳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나라를 이어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는 진나라의 법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통치 이념으로는 유학(儒學)4을 선택한다. 진시황같은 괴물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서가 아니었을까. 조선이 망한 것도 유교 때문이라기보다 나같은 헛똑똑이들이 시험 잘 봐서 벼슬자리 차고 앉아있어서일 게다. 공부를 하고도 그 뜻을 모르니 헛똑똑이가 아니면 대체 뭔가?

한가지 더.

진나라 시대의 기와. (출처: flickr@laanba)

그러나저러나 정말 우습군. 같은 내용을 읽으면서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이전의 내가 모질었던 건지 아니면 지금의 내가 물러터진 건지.


  1.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한자는 중국의 소국마다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2. 당시엔 종이가 없어, 서류는 나무를 쪼개 만든 죽간에 적었다. 그래도 30kg이면 엄청난 양이다. 

  3. 사기열전 여불위전. 

  4. 진나라의 통치 이념은 법에 의한 엄격한 통치를 지향하는 법가(法家)였다. 반면 유학(儒學)은 위험한 사상 취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