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한 벌 새로 샀을 뿐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버렸다.
1.

http://www.flickr.com/photos/picadillybln/3087698984/
내가 스키니 진을 입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작년 초부터 시작된 체중 감소는 2년이 다 되도록 꺾일 기미가 없었고, 결국 지난 겨울 장만한 바지들이 몽땅 못 입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헐렁한 바지를 "걸치고" 나가사키를 돌아다니던 나는 한국 가면 당장 청바지부터 새로 장만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실수로, 스키니 진을 집어버린 것이다. 평소엔 스키니 진엔 눈길도 준 적이 없었다. 내가 본 남자들 중에 이 물건하고 별로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떨떠름해 하면서도 일단은 사왔다. 그게 대략 3주 전 일이다. 그런데 이걸 입고 다니자니, 다들 좋다고 난리다. 갑자기 멋있어졌다고. 바지 하나 바꿨을 뿐인데 왜 그럴까? 궁금해하던 나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쭉 뻗다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 이 바지가 다리를 길어 보이게 하는구나. 워커하고 어울리니 키도 커보이는구나. 이래서 스키니 스키니 하는 거였구나...
2.
기분이 좋아졌냐고? 전혀. 오히려 모골이 송연해졌다. 여성들이 왜 일부러 작은 옷을 사 놓고 그걸 보면서 굶는지, 아무리 봐도 멀쩡한데 살이 쪘다며 고민하는지 그제사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살을 빼면, 훨씬 예뻐보일 수 있다. 남자인 나야 멋있어졌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런가보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게 생물학적인 정체성 내지 자존심이다. 이러니 목숨을 걸고 살을 빼겠다고 덤벼들 수밖에.

"어디보자... 6호 사이즈 옷은 없어. 여긴 죄다 2호하고 4호 뿐이라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3.
"역시 강남역엔 이쁜 여자들이 많아서 좋구나."
"훗, 저 아가씨들한테 체지방 분석표를 던져주면 70%는 사색이 될껄."
남자들은 여자들의 외모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길 좋아한다. 누군 못생겼네, 누군 성형이네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훨씬 깐깐했다. 꼴에 운동 좀 했다고, 누가 봐도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에게 마른 비만이라는 딱지를 거침없이 붙였으니까. 미련하게 운동도 안 하고 살을 빼려 한다며, 나이 들면 고생 좀 하겠다며 핀잔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아니, 확실히 잘못했다. 여자들은 남자하고 달라서, 똑같은 운동을 해도 훨씬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은퇴한 여자 운동 선수들은 남자 선수들보다 퇴행성 근육 질환을 더 많이 앓는다. 근육 운동이 체중 감량의 지름길인 건 맞지만, 실제로 여성들이 그걸 실행하는 건 남자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남자들도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은 소수라는 걸 생각하면, 여성이 운동으로 몸매를 가꾼다는 건 말이 쉽지 고난의 행군이다. 그렇다면 당장 날씬해지고 싶은 여성들이 어떤 짓을 할지, 대답이 필요할까? 굶거나 미심쩍은 약에 손을 대는 것밖에 더 있나?

이 정도 뒤테를 만들려면 정말 독하게 운동해야 한다.
4.
청바지 하나 바꿨을 뿐인데, 열흘도 안 돼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옷집에서 끼워 준 사은품인가.

이건 뭐 <왓 위민 원트(2000)>도 아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