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

CRITIQUE by 고어핀드 2010/09/19 11:40

청바지 한 벌 새로 샀을 뿐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버렸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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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lickr.com/photos/picadillybln/3087698984/

"이게 훨씬 더 잘 어울리시네요. 그냥 이걸로 하시죠?"

내가 스키니 진을 입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작년 초부터 시작된 체중 감소는 2년이 다 되도록 꺾일 기미가 없었고, 결국 지난 겨울 장만한 바지들이 몽땅 못 입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헐렁한 바지를 "걸치고" 나가사키를 돌아다니던 나는 한국 가면 당장 청바지부터 새로 장만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실수로, 스키니 진을 집어버린 것이다. 평소엔 스키니 진엔 눈길도 준 적이 없었다. 내가 본 남자들 중에 이 물건하고 별로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떨떠름해 하면서도 일단은 사왔다. 그게 대략 3주 전 일이다. 그런데 이걸 입고 다니자니, 다들 좋다고 난리다. 갑자기 멋있어졌다고. 바지 하나 바꿨을 뿐인데 왜 그럴까? 궁금해하던 나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쭉 뻗다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 이 바지가 다리를 길어 보이게 하는구나. 워커하고 어울리니 키도 커보이는구나. 이래서 스키니 스키니 하는 거였구나...

2.

기분이 좋아졌냐고? 전혀. 오히려 모골이 송연해졌다. 여성들이 왜 일부러 작은 옷을 사 놓고 그걸 보면서 굶는지, 아무리 봐도 멀쩡한데 살이 쪘다며 고민하는지 그제사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살을 빼면, 훨씬 예뻐보일 수 있다. 남자인 나야 멋있어졌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런가보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게 생물학적인 정체성 내지 자존심이다. 이러니 목숨을 걸고 살을 빼겠다고 덤벼들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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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보자... 6호 사이즈 옷은 없어. 여긴 죄다 2호하고 4호 뿐이라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몸무게만 그런 게 아니다. 좀 더 예뻐보이려는 여성들의 노력은 때로는 자해에 가까운 일도 한다. 꽉 끼는 스키니 진은 혈액 순환을 망가뜨리고, 킬힐도 척추와 다리뼈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 듣자니 그걸 신으면 발이 무지하게 아픈가보다. 그런데 아프다면서도 계속 신는다. 옛날 중국 여인들은 발을 작게 하기 위해 전족이라는 끔찍한 고통1을 감수했다는데, 알고보니 그게 현재 진행형인 것이었다. 이러니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3.

"역시 강남역엔 이쁜 여자들이 많아서 좋구나."
"훗, 저 아가씨들한테 체지방 분석표를 던져주면 70%는 사색이 될껄."

남자들은 여자들의 외모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길 좋아한다. 누군 못생겼네, 누군 성형이네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훨씬 깐깐했다. 꼴에 운동 좀 했다고, 누가 봐도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에게 마른 비만이라는 딱지를 거침없이 붙였으니까. 미련하게 운동도 안 하고 살을 빼려 한다며, 나이 들면 고생 좀 하겠다며 핀잔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아니, 확실히 잘못했다. 여자들은 남자하고 달라서, 똑같은 운동을 해도 훨씬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은퇴한 여자 운동 선수들은 남자 선수들보다 퇴행성 근육 질환을 더 많이 앓는다. 근육 운동이 체중 감량의 지름길인 건 맞지만, 실제로 여성들이 그걸 실행하는 건 남자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남자들도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은 소수라는 걸 생각하면, 여성이 운동으로 몸매를 가꾼다는 건 말이 쉽지 고난의 행군이다. 그렇다면 당장 날씬해지고 싶은 여성들이 어떤 짓을 할지, 대답이 필요할까? 굶거나 미심쩍은 약에 손을 대는 것밖에 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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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뒤테를 만들려면 정말 독하게 운동해야 한다.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감내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우리네 남자들한테 그녀들의 외모를 함부로 평할 수 있는 권리는 전.혀.없.다. 오히려 여성들 앞에 굽신굽신해야할지도 모른다2. 그래, 우리 남자들, 정말 죄 많은 동물들이다. 참회해야 마땅하다. 특히 나부터.

4.

청바지 하나 바꿨을 뿐인데, 열흘도 안 돼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옷집에서 끼워 준 사은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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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왓 위민 원트(2000)>도 아니고...

  1. 링크를 클릭해 보면 알겠지만, 전족을 하면 발 자체가 하이힐 모양이 된다. 이 점이 또 묘하게 의미심장. [본문]
  2. 참고로 이탈리아에서는 거리에서 이런 모습도 연출된다고... 우린 저렇게 되려면 턱도 없잖아!! OTL [본문]
2010/09/19 11:40 2010/09/1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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