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탄생시킨 구마모토의 별미,

바사시미(馬刺身, 말고기회).

2010년 8월 18일
일본 규슈(九州) - 구마모토 시

1.

"물도 식량도 떨어졌다.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

1597년 12월 23일, 공세에 나선 조명 연합군이 울산성을 에워싼다. 울산성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만 오천명의 병력이 있었다. 다급해진 기요마사는 근처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조명 연합군은 태화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구원군을 간단히 격파해 버렸다. 이제 성에 갇힌 일본군은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극심한 추위가 일본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식량과 급수가 중단되었다는 것이었다. 울산성은 견고한 성이었지만, 우물이 없었다. 일본군은 물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밤중에 성 밖 태화강까지 나가야 했다. 물론 조선군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강 곳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가 일본군이 보이는 족족 잡아죽였다.

울산왜성 공성도.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Ulsan_waesung_attack.jpg

먹을 것이 없어진 일본군은 말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쌀은 철포병(조총수)에게만 하루 한 홉씩 배급했다. 굶주린 일본군은 피골이 상접하여 입은 갑옷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근처의 일본군이 집결해 온 덕분에, 조명 연합군은 1월 4일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 살아남은 울산성 수비대는 500명에 불과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이 전투는 그의 근거지 구마모토에 뚜렷한 흔적들을 남겼다. 전쟁이 끝나 일본으로 돌아간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을 쌓을 때 성 안에 120개나 되는 우물을 파고 고구마 줄기로 짠 다다미를 깔았다. 유사시 급수난이나 식량난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 기요마사가 죽음의 위기에서 먹었던 말고기는 구마모토의 명물 음식이 되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지만, 꽤나 맛있었나 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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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기 입구.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구마모토 성 관광을 마친 우리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아오야기(靑柳)는 구마모토 성에서 전차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간판에 적힌 "향토 요리"가 눈에 들어왔다. 구마모토의 명물, 말고기 요리를 하는 음식점이었다. 말고기 런치 2인분을 시켰다. 계란찜, 우동, 초밥과 곁들인 말고기 회가 나왔다.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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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별로 회를 친 것 같다. 왼쪽 살들은 어느 부위인지 질감이 약간 미끌미끌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생전 처음 먹어 보는 말고기는 소고기나 돼지고기와는 많이 달랐다. 우선 비릿한 감이 전혀 없고 아주 단백했다. 반면 소고기 육회와는 달리 약간 질겼다. 말은 근육이 발달한 동물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맛은 전체적으로 아주 고소하다. 소고기와는 달리 달콤한 향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런치 세트에는 말고기 초밥(우마니기리)도 한 점 포함되어 있어서 맛을 볼 수 있었다. 생선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고소함이 느껴졌다. 여담이지만 보통 참치 초밥이나 광어 초밥에는 아무 것도 얹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 내 오는 초밥에는 일본식 쌈장이나 깨가 올라가 있었다. 이 곳만 그런 것인지, 구마모토의 지역색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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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고기 쥠초밥(우마니기리). 쌈장이 살짝 올라가 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3.

주머니 가벼운 배낭 여행객이 비싼 음식을 사먹은 것은 이것이 별미인 탓도 있었지만, 함께 여행한 형이 먼저 귀국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형보다 이틀 더 여행을 하면서 나가사키를 둘러 볼 예정이었다. 점심을 먹고 형은 먼저 기차를 타고 후쿠오카로 향했다.

형을 보낸 나는 구마모토 시내를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오후 다섯 시쯤 다시 아오야기로 발길을 옮겼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우마니기리 세트를 주문했다. 쥠 초밥 여덟 개에 2400엔이니 딱 하루 밥값(!!)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미 가격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내 머릿속에는 이 맛있는 것을 더이상 먹을 수 없는 생각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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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고기 초밥. 오른쪽은 날것, 왼쪽은 숯불로 구운 것이다. 숯불로 구우면 특유의 단백함은 그대로지만, 질김은 반이 되고 고소함은 두 배가 된다. 육즙이 입 안을 흐르면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마지막 만찬을 즐긴 나는 편의점에서 우유 두 팩과 삼각김밥 하나를 사서 나가사키로 가는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결국 이날 저녁은 진수성찬과 걸식을 반반씩 한 셈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들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책을 읽던 내 머릿속에는 말고기가 계속 둥둥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