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나는 연애편지를 정말 많이 써본 사람이다.
정작 내 게 하나도 없어서 문제지만.
1.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커플링을 하는 게 흔하지만, 내가 살던 동네는 좀 조숙한 감이 있어서 내가 아직 어리던 시절에도 그런 문화가 있었다. 그 속에서 내가 하던 일은, 서툰 풋사랑의 감정을 전하고픈 친구의 마음을 살짝 손봐 깨끗하게 글로 옮겨주는 것이었다. 마음은 있지만 그걸 전달하는 재주는 다소 모자라는 소년. 글은 좀 쓰지만 그 "판" 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던 못난이(Nerd). 자원의 비대칭적 분포란 이런 것인 모양이었다. 신의 섭리는 이토록 오묘하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본의 아니게, 서툰 사랑을 하는 내 또래 소년들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백 개의 마음이 있다면 백 개의 사연이 있었고, 서툴거나 조숙한 정도도 다들 달랐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사랑과 연애라는 테마가 가져다주는 다양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기야 괜히 인류의 영원한 테마라는 별명이 생긴 건 아니겠지.
2.

워낙에 유명한 곡이다 보니, 아마 제목은 몰라도 귀에 익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 하프시코드는 바로크 시대에 많이 쓰인 피아노의 전신(前身) 격 악기인데, 고전주의 시대 이후 잘 쓰이지 않아 지금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 곡의 국내 유통 음원 중에는 하프시코드 연주 버전이 있지도 않다. 하프시코드의 차분한 음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석한 일이다.
<Handel: Hwv437, Harpsichord Suite No. 4 in D Minor - 4. "Sarabande". 결국 미국 iTunes Shop에서 $0.99에 구입했다.>
재미있는 건 영화에 차분함을 더해 주던 이 곡의 정체. 사라방드Sarabande는 헨델 당대에 유행하던 일종의 춤곡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헨델의 작품 중에는 같은 제목이 붙은 곡이 이것 말고도 몇 개가 더 있다. 문제는 요새 이걸 듣는 사람 중에서 이걸 춤곡으로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곡이 본래 춤곡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깜짝 놀란다. 그럴 만도 하다. 실제로 이 곡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삽입된 "나우시카 레퀴엠" 의 원곡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이 곡이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더는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한다.
3.

언젠가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게 한쪽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었다면, 이 세상 모든 슬픔과 갈등의 9할 9푼은 아마도 사라졌겠지." 그래, 지금 이 상황에 딱 맞는 말이다. 그녀가 떠나가는 데, 그의 진심 같은 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4.
친한 형 K 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슬쩍 보니, 수신자 이름은 없고 하트 하나만 달랑 보인다. "누구한테 보내는 거에요?" "누구긴 누구겠냐ㅋ" 여친인 P양에게 보내는 것인 모양이었다. 문자 하나를 보내면서도 입이 귀에 걸린 걸 보니, 저렇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말하는, 그 "진심" 이라는 물건의 또다른 모습인 모양이었다.
"거짓" - 혹은 "조작"으로 사랑을 이뤄 주는 연애 조작단이라는 소재가 무색해지게, 이 영화는 진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무리 서툴고 어설퍼도 진심이면 꼭 이루어질 거에요." 맞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현실을 바꾸지 못할 수준의 바램이란 결국 진심이 아니라 "아니면 말고" 에 불과한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필자로서의 내 기억은 꼭 반대 사례들만을 오래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젠가 들었던 드라마의 대사 한 토막도 함께 생각나곤 한다: "진심이면 뭘 하나요? 그걸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5.

듣는 이들이 춤곡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춤곡인 것일까,
아니면 타고나길 춤곡이면 춤곡인 걸까?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진심인 걸까,
아니면 품고 있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진심인 걸까?
진실은 어느 쪽일까?
<사족>
제목과 느낌 사이의 괴리감으로 만만치 않은 곡에는 포레Faure의 파반느Pavane가 있다. "파반느" 또한 춤곡의 장르인데, 이 곡은 무려 천안함 피격 사태 때 유족들을 위한 성금 모금 프로그램에서 사용됐다. 정체가 궁금하다면 일단 들어 보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