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장에서 막강한 전투력을 뽐냈으나,

사실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자주 들르는 블로그들에서 한니발과 스피키오에 대한 논의가 잠시 오가서, 생각난 김에 슥슥.

전쟁 용어 중에 파비우스 전략 Fabian Strategy 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지구전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맞서 싸우지 않고 싸움을 질질 끌어 상대편을 지치게 하는 군사 전략이다.

이 말의 기원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두 번째 전쟁(BC218 ~ BC202)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정은 이렇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로마 군을 차례로 격파,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한다. 몇 번의 패배를 맞본 로마군은 긁어모을 수 있는 전투력을 최대한 집결시켜 결전을 벌였지만, 오히려 야전군이 싹 날아가는 완패를 당한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출처: wikipedia commons)

기본적으로 이 패배의 원인은 당시 로마군의 특성 때문이다. 로마군은 전통적으로 기병의 비중이 적었고, 또 약했다. 본거지인 이탈리아 반도가 말이 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기병을 키울 수도 없었고 기병을 상대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한니발은 막강한 기병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걸 활용해서 로마군을 전멸로 몰아넣었다.

새로 로마 군의 지휘를 맡게 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작전을 바꾼다: 한니발과의 교전을 피하고, 도시를 굳게 지키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15년 뒤 한니발은 아무 전과도 얻지 못한 채 이탈리아 반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지금의 파비우스식 전략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뒷사정을 살펴보면, 파비우스의 전략이 단순히 상대방이 지치길 기다리는 전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기병의 유지비

게임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기병은 아주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이 기병에게도 큰 약점이 하나 있다. 바로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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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탈리아 반도의 기마무사상. BC 550년경,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한 그리스계 도시국가인 타란토에서 만든 것이다. 대영박물관 소장.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말은 보통 풀을 먹지만, 그렇다고 아무 풀이나 먹는 것도 아니다. 말이 먹기 위해서는 충분히 좋은 목초지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전쟁터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말먹이를 마련하는 것는 것은 어느 군대에나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사를 주축으로 하는 중세 군대의 주요 군수품 중 하나가 바로 낫이었다. 중세 독일의 슈만칼덴 전쟁(1546 ~ 1547) 당시 황제군이 보유한 군수품 목록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850개의 낫이 포함되어 있다. 낫이 잇어야 풀을 베어다 군마에 먹일 게 아닌가? 고대 로마의 경우, 기병들은 식비 외에도 말 사료값을 따로 지급받았다. 정확한 출처는 잊어버렸지만, 1차 세계대전 때도 기병에 필요한 보급품의 양이 보병 보급품의 대략 3배에 달했다고 한다. 말을 먹이는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답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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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재갈. 기원전 400 ~ 300 년경 이탈리아 남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생산력이 좋지 못하던 고대에 이런 부가물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꽤나 돈이 많이 들었을 듯 하다. 대영박물관 소장.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먹이기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말 자체의 소모는 더 심각하다. 20세기 초 보어 전쟁(1899~1902)에서 영국군은 51만 8천 마리의 말을 동원했는데, 그 중 34만 7천 마리를 잃었다. 하루에 336마리를 잃은 셈인데, 실제로 전투에서 죽은 말은 2%가 채 안된다고 한다. 나머지는 과로나 질병 등으로 죽어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진 남아프리카는 목초지도 많고 날씨도 온난한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 군사작전에서 엄청난 수의 말이 죽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공격적 방어

파비우스의 전략이 가지는 무서운 점은, 상대방이 지닌 장점을 봉쇄할 뿐만 아니라 그 장점을 소모시키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틀림없이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 군에 비해 수적으로, 또 질적으로 압도적인 기병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군의 시체로 산을 쌓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이탈리아 반도에서 말을 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해외에서 보급받으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시 지중해의 제해권은 로마 해군이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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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포르티노 투구. 기원전 4세기 경 이탈리아 북부의 켈트 족이나 에트루리아 인들이 사용하던 투구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투구는 한니발 전쟁을 포함한 공화정 시기 내내 가장 표준적인 로마 보병 투구였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 히긴스 아머리 소장.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한니발이 아무리 날뛰어도, 기병으로 성을 공격할 수는 없다. 게다가 말이란 본질적으로 소모품인 만큼, 그의 기병들이 사용하는 말들도 언젠가 바닥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기병을 전투의 핵심 키로 사용하는 한니발도 더이상 그 솜씨를 내보일 수 없게 된다. 실제로 파비우스식 전략은 이것을 성공시켰다.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할 때, 동원했던 병력은 모두 5만 명으로, 그 중 기병은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를 떠날 때(BC 203), 거느렸던 병력은 모두 보병 15,000명이다. 기병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기병들이 어떻게 녹아 없어졌는지는, 아마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방어적이지만, 방어적이지만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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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의 말. 이탈리아 반도 내에는 의외로 큰 말의 산지가 없다. 아마 한니발 전쟁 시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flickr@pixx0ne)

"싸울 수 없을 때는 마땅히 지켜야 한다(不能戰當守)."는 말이 있다. 파비우스식 전략은 틀림없이 물러나 지키는 데 가깝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한다고 지구전법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강점을 최대한 빨리 소모시킬 수 있어야 한다. 파비우스식 전략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 John Keegan, 『A History of Warfare』, Vintage, 1994 (유병진 역, 『세계전쟁사』, 까치, 1996)
  • Mark Healy, 『Cannae 216 BC: Hannibal smashes Rome's Army』, Osprey, 1994 (정은비 역, 『칸나이 216 BC』, 플래닛미디어,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