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

CRITIQUE by 고어핀드 2012/03/06 20:33

불변의 진리 하나,

"확률은 법칙이 아니다."

1.

스쳐 지나가는 남자들이 다들 한 번쯤 고개를 돌려 뒤돌아볼 법한 미녀와 마주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여름이었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건널목 맞은편에 웬 아가씨가 서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 보였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인데?' 하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나와 스쳐지나가는 순간까지도, 그녀가 답을 찾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10년 전, 아직 여고생이던 그녀는 여신이었다. 나는 그녀 때문에 애를 태운 소년들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구애를 거절했는지도 기억한다. 심지어 그녀가 왜 그랬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갔다. 1년 가까이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면서도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으니까. 이제사 남사스럽게 아는 척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 그러면, 대체 인사 한 번 한 적이 없는 내가 어찌 이리도 잘 알고 있느냐고?

2.

"어머, 네가 고어핀드구나."

10년 전 일이다.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가 아는 척을 했다. 나는 남고를 다녔지만, 학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공부했다. 수업은 밤 늦게 끝났다. 아무리 주택가라지만 밤 늦게 여고생이 혼자 나돌아다니기엔 험한 세상이다. 그래서 학원 입구에는 따님을 데리러 온 어머니들이 서서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곤 했다. 그날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한 것은, 여신을 기다리던 그녀의 어머니였다. (편의상 '여신 엄마'라고 하자.) 나는 그 뒤에도 여신 엄마와 여러 번 마주쳤고, 짤막 짤막하게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여신' 그리고 '여신 엄마'는, 고민이 태산이었다. 얄궂게도, 원인은 애정 문제였다.

여신에게는, 좋아하던 오빠가 하나 있었다. 세상 전부를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던 그 오빠. 둘은 사귀었다. 하지만 어느 날 여신이 '오빠'에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심한 짓을 하자, 완전히 폭발해 버린 그 '오빠'는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여신의 머릿속에는 두 생각 뿐이었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그 오빠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까였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 몰려든 수많은 소년들의 구애를 어떻게 거절하느냐였다. 그럴 만도 했다. 매년 3월 14일이면, 11월 11일이면, 그녀 앞에 쌓인 산더미같은 선물들이 장관을 이루곤 했으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같은 "전문 대필가"에게 카드 한 장이라도 대신 써달라는 요청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때였다.

세상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한 무리의 이성들이 내 애정을 받고 싶어서 몰려드는 사태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애시당초 남 생각에 잠을 못 이룬다는 느낌마저 희미해서, 두 사태가 함께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돈에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이야기만큼이나 황당하기만 하다. 어쨌든, 여신 엄마는 고민이 태산이었다. 삶에서 아니 중요한 시기가 어디 있겠느냐만, 대한민국에서 고3은 그 중요도가 유난히 높은 시기다. 그런데 그 고3을 목전에 둔 딸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같은 학년 소년을 붙들고 하소연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나같은 인간한테 이런 얘길 한다는 것 자체가 참새가 금붕어 앞에서 날개짓 걱정 하는 격이었지만.

3.

"아름다움은 천재성의 한 형태일세. 아니, 오히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어. 왜냐하면 이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거든."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에서 작중 인물 헨리 경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사실 아름다움이 얼마나 요긴한 축복인지는 이미 많은 연구들이 실증한 바 있다. 근사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능력에 비해 더 많은 봉급을 받으며, 선거에서 이길 확률도 높고, 수입도 심지어 부모의 사랑마저 예쁜 아기가 더 많이 받는다. 이 정도면, 아름다움은 권력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지경이다.

누구나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부러워한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 수많은 성형외과들과 헬스장들이 거대한 산업을 이룬 이유일 것이다. 남녀 할 것 없이, 그만큼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애정 문제에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다. 누구든 선망해 마지않을 빼어난 외모를 가진 젊은 여성이라면, 그 유리함은 이루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을 게다.

하지만 그 유리함도 결국은 확률의 문제일 뿐,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여신에게, 그녀의 미모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없느니만 못했다.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 많은 남자들 중 자신이 찾는 단 한 사람만은 없는 기분이 어떠한 것인지, 나로서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차라리 그녀에게 몰려든 수많은 남자들이라도 없었다면, 그녀의 괴로움은 훨씬 덜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알 길은 없지만, 더 끔찍한 게 아직 남아있었다. 이것은 그녀의 고민거리를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던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여신은 가족 외에는 자기 고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왜 이걸 입 밖에 내질 못하지 하는 생각이 들거든 스크롤을 올려서 다시 한 번 읽어봐라. "엄마는 왜 나를 이렇게 낳아서 내 삶을 피곤하게 하는지" 딱 이거 아닌가? 이걸 입 밖에 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여신은 말 그대로 여신이었다. 기획사에서 제의가 몇 번씩이나 왔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녀의 미모는 축복 같은 거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어떤 면에선 차라리 고문 도구였다.

4.

그리스 신화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담당하는 신 에로스는 활과 화살을 든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구태여 이런 모습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성에게 꽂히는」 것은 무작위로 쏜 화살을 맞는 것만큼만이나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나는 이 캐릭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주목하는데, 그건 바로 이 녀석이 초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녀석의 잔인한 장난은 꽤나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고3은 후딱 지나갔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더이상 여신을 볼 일은 없었다. 애시당초 그녀와 나는 모의고사 점수가 몇십 점씩 차이가 났다. 미적분학 시험준비에 정신없던 어느 날, 나는 여신이 재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뿐이다. 그걸로 끝이었다.

5.

facebook에 들어갔는데, 어디서 본 듯한 프로필 사진이 떴다. 여신이었다. "이 사람을 알고 계시나요?" 아마도 facebook의 검색 시스템이 나와 여신 사이에 있는 지인들을 찬찬히 살펴본 모양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조용한 밤, 스피커에서는 2ne1의 『ugly』가 흘러나온다. "난 예쁘지 않아, 아름답지 않아..." 가사를 가만히 음미하고 있다 보니, 내가 처해 있는 상황 자체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x자를 눌렀다. 1년 넘게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면서도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으니, 이제사 남사스럽게 아는 척을 할 필요도 없었다.

프로필 사진 속의 여신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 사진만 보고선 그녀가 밤새 침대가 다 젖도록 울었던 적이 있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다. 가슴을 쪼개던 아픔, 머릿속을 먹먹하게 만들던 상처, 이제는 많이 아물었을까.

2012/03/06 20:33 2012/03/0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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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aren
    2012/03/10 00:53
    ...무진장 여신의 사진을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이군요
  2. 미스트
    2012/05/16 12:56
    반대로 평범하게 생겨서 눈길 못끄는게 고민인 사람도,
    못생겨서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는게 고민인 사람도 있겠죠.

    DC의 흔한 이야기처럼, 이겨도 xx 져도 xx면 이기는 xx가.... ....
    잘생겨도 고민 못생겨도 고민이면 잘생기는게 낫겠죠.
  3. 義劒
    2012/10/30 01:43
    으이구...그러니까 고어군이 여친이 없는거라는. -ㅅ- 하늘이 내린 기회를 스쳐지나가게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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