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에서 공식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종의 출신성분이 아닐까 싶다.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Tv 연속극이든 로미오와 줄리엣이든 기본은 사랑 이야기이고, 사랑 이야기라면 이뤄지지 않는 안타까운 사랑에 마음 아파하는 선남선녀들이 등장해야 하는 게 공식일 게다. 원수의 딸을 사랑하고 해야 뭔가 드라마가 되지 않겠는가? 어떻게 보면 이 출신성분이란 원죄와도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전략 게임이라고 하면 보통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공식이 적용된다. 자원의 관리와 전투의 실행이다. 때때로 전투의 실행에 초점을 맞추는 게임들이 등장하고는 하나 자원의 관리 자체가 없는 경우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코만도스를 예로 들어 보자. 전투에 머리를 엄청나게 써야 하고, 인터페이스 역시 이것을 최대한 서포트하는 방향으로 디자인되었지만, 그렇다고 자원 관리가 없는가? 있다. 대원들의 장비다. 폭파 미션에는 반드시 필요한 핸콕의 폭약이 엉뚱한 데 공수되어 있기도 하고, 불멸의 치트코드인 스나이퍼의 총알은 대여섯 발 밖에 쓸 수가 없다. 없으면 낭패다.
그러면 전략 게임의 한 장르인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 그 중에서도 일종의 "땅따먹기"로 불리는 게임들의 공식은 어떤 것일까? 영토를 차지하여 자원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강한 군대를 양성하여 또 땅을 따먹어 결국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되겠다. 여기에 현실감을 높여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인재라는 자원의 관리(충성심 관리)라던가 날벼락처럼 떨어지는 이벤트들일 것이다.
실제 같은 외교 이벤트
내 생각엔 두 요소의 싱크로율에 달린 게 아닌가 싶다.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 무한 맵으로 하면 전투에 재미가 없다. 왜? 자원이 남아돌기 때문에 확장기지를 쟁탈하기 위한 지독한 전투가 별반 의미가 없어진다. 코만도스에서 스나이퍼의 총알이 무한이라고, 혹은 일치감치 스파이를 위한 군복이나 마린을 위한 고무 보트가 전부 갖춰져 있다고 해 보자. 코만도스가 이렇게 유명해 졌을까?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자원을 얻어 군대를 생산하여 전투를 수행한다 - 이 두 행위간의 연관성이 높지 않으면 게임은 재미가 없어진다.
문제는 이런 사태가 자주 벌어진다는 것이다. 유명한 게임들 중 역시 코에이의 게임인 삼국지 시리즈를 생각해 보자. 삼국지에서 재미있었다고 생각하는 시리즈는 3, 6, 7, 9로 기억하는데, 여기서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첫경험 중 하나였던 3와 역할 놀이(role play)를 강조한 7을 제외하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내정이 중요하다" 것이다.
삼국지 4의 경우는 공성전을 제외하면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재미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 삼국지 시리즈에서 최근을 제외하면 그리 내정 - 그러니까 자원의 생산에 신경을 써본 기억이 별로 없다. 왜 그런고 하니, 자원을 직접 개발해서 얻는 이익보다 옆 성을 공격해서 얻는 자원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자연히 게이머는 자신의 영토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고(그저 배신 때리지 않을 정도의 장수들 몇 명만 머리 채우기로 배치하고) 먼치킨처럼 전투에만 열중하게 된다. 단순한 전투의 연속이다. 계속 자원을 약탈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병력 수를 채워 나가면 그만이다. 고민 같은 건 필요가 없다. 내정은 필요 없는 커맨드로 전락한다.(이런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게임의 완성도를 해치는 행위다.)
저 땅을 다 먹는거다. 존내 먹는 거다.
또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는 문관들에게 일거리를 더 줄 필요도 있는데, 9은 그 점에서 아주 훌륭하다. 무관이 이끈 부대가 출진하면 적절히 책략과 고무 등의 지원을 해 주어, 근처 성에 진주한 문관과 무관들이 합심하여 "참모본부"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게임은 더욱 더 그 흥미를 더하게 된다.
문제는 자원이다
신장의 야망: 천하창세는 이 점에서 아주 주목할 만한 해결을 보여 준다. 첫째로, 경제개발을 하지 않으면 부하 무장들에게서 충성심을 보장받을 수가 없다.(정말이지 시대적 배경에 충실하다!!) 둘째로 한 성당 보유할 수 있는 병력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경제 개발을 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병량(식량)과 철포 등의 병장기가 대단히 귀하다. 전쟁 많이 하고 싶으면 무지 아끼고 비싼 물건을 잔뜩 사들여야 한다. 삼국지처럼 농사 짓는 데 무관심하다가는 바로 즉사당한다.
한 성당 보유할 수 있는 무사의 수가 제한되어 있고, 이들을 먹여살릴 물자 또한 필요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성 저 성을 모두 개발하고 장수들을 균형 있게 배치할 필요가 있다. 한 곳에 몰아 놨다가는 출진 가능 병력은 1만 명인데 6천 명만 출격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장의 야망 시리즈의 강력한 병력 집결 시스템이다. 어딘가에서 전투를 한다고 할 때, 전장에 배치된 병력만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나라 전체에서 무장들이 모여든다. 미디블 토탈워나 삼국지처럼 싸움 잘하는 장수들을 한 곳에 몰고 다니면서 전쟁을 했다가는 자원 고갈로 전멸당하기 딱 좋다. 한 성으로는 도저히 물자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땅이 곧 자원이다"라는 명제는 미디블처럼 땅에서 세금을 걷는 게임보다도 철저하게 지켜진다. 결국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게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편리하게 물자를 교환할 수 있다. 무엇보다 턴이 안 들어간다.
여러 성에서 최고의 부대를 소집하자
성에 박힌 애들을 끌어내기 위해 농가를 박살내는 적군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전략성이 대단히 높은 전투다. 천하창세의 전투는 대단히 직관적이어서, 병력을 회복할 수 있는 몇 개의 숙영지와 마우스 오른쪽 클릭으로 간단하게 이동이 가능한 부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 가지고 그냥 싸우면 된다.
단순해 보이지만 직접 해보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먼저 일본 전국시대의 전투인 만큼 병력이 항상 귀하다. 병력을 회복하기 위해 숙영지에 계속 넣었다 뺐다 하면서 싸워야만 하는데 이 중요한 숙영지가 무지 약하다는 게 또 문제다. 보병 두세 부대로 맘잡고 패면 순식간에 함락되는데, 이러면 그야말로 재앙이 벌어진다. 숙영지 자체의 전투력에 가까이 있는 아군 부대가 노출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고, 적이 전투가 벌어지는 바로 앞에서 병력을 회복해가면서 싸운다는 것이 그 두번째며, 아군의 사기가 급감하고 함락된 숙영지 근처에 배치된 병력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 그 셋째다! 대열이 붕괴되면서 대군이 순식간에 괴멸한다. 처음에 이걸 잘 몰라서 대패한 적이 얼마나 많던지.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비등비등한 상태에서 숙영지 함락되면 바로 즉사다. 참고로 이 전투는 내가 지휘하는 군대 12000명과 적 15000명이 싸운 전투다. 12000명 중 4600정의 철포가 동원되었다.
게임마다 그 게임의 주가 되는 행위가 있을 것이다. 귀무자 같은 액션 게임이라면 액션 일 것이고 따라서 화끈한 칼부림 감각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전략 게임이라면 당연히 전투가 주가 될 것이다.
게임 개발자로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마음가짐이란, 어찌 보면 "내가 지금 만들고자 하는 시스템이 다른 시스템, 특히 이 게임의 주 활동과 얼마나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천하창세는, 내게 적어도 그것을 보여 준 게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