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7일 오후 12시

영국 포츠머스

전쟁사를 좋아하는 사람 치고 영국의 장궁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 기사들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이 무기는 『Age of Empires 2: The Age of kings』 나 『Medieval: Total war』 등의 전략 게임에도 등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꽤 친숙한 편이다.

Medieval: Total war에 등장한 장궁병.

하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실물이 매우 귀하다. 기본적으로 유기질로 만들어진 소모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82년 이전까지 중세 장궁 유물은 단 5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히 1982년 메리 로즈 호가 인양되면서 137개의 장궁 유물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침몰한 르네상스 시대 잉글랜드 전함에서 3500개의 화살촉과 함께 발견된 이 유물들은 중세의 전쟁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포츠머스에 있던 메리 로즈 호 전시관에서는 이렇게 발굴된 장궁들의 일부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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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명으로 만들어진 전투용 캐럭인 메리 로즈는 1536년 개수 뒤 1545년 첫 출격에서 어이없이 침몰해 버리고 만다. 당시 배들은 상선 등으로 사용되다가 대포만 실으면 전함이 되는 식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투용으로 건조해서 한꺼번에 한쪽 측면의 대포를 모두 발사할 수 있는 배는 신기한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1982년 인양된 메리 로즈 호는 포츠머스 군항 한켠에 있는 샤워 시설에서 오늘도 민물을 뒤집어쓰면서 500년간 묵은 소금기를 빼고 있었다 - 선체 전시관 옆에는 작업 완료까지 100년 이상은 걸린다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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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Rose 호에서 발견된 르네상스시대 영국의 장궁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중세 잉글랜드 군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장궁이지만, 그 기원은 본래 잉글랜드 서쪽의 웨일즈 지방이다. 지금이야 웨일즈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와 함께 영국의 일원이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엄연히 다른 나라였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전쟁은 1282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즈 전토를 장악하면서 끝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에드워드는 웨일즈 군이 사용한 장궁을 눈여겨보게 되는데, 장궁 특유의 사정거리와 정확도에 의해 잉글랜드 군이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는 웨일즈의 장궁수들을 잉글랜드 군에 편성하였고, 곧 장궁은 잉글랜드 군의 장비로 채용되었다.

영화 『Braveheart(1995)』의 한 장면.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스코틀랜드 군에게 화살을 날리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 군에 도입된 장궁은 국가적인 육성 정책 등으로 인해 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장궁은 잉글랜드 군과 스코틀랜드 군이 겨룬 Falkirk 전투(1298)나 100년 전쟁의 주요 전투들 - 크레시Crecy 전투(1346), 아쟁쿠르Agincourt 전투(1415) 등 - 에서 잉글랜드 군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15세기부터 유럽 대륙에서는 총이 활을 대체해 나가기 시작하지만, 영국에서는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장궁이 마지막으로 전쟁에 사용된 것은 잉글랜드 내전(1641~1651)에서 왕당파 군대가 사용한 것 - 정확히 이야기하면 1642년 10월의 Bridgnorth 전투 - 이었다.

특징

장궁은 언뜻 보면 통나무를 대충 깎아서 만든 듯해 보이지만,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니다. 장궁은 나무(주로 주목(朱木, Yew))를 잘라다 1~2년 이상 건조시켜서 만든다. 이렇게 건조된 나무를 적절한 길이1로 잘라서 단면이 D자 모양이 되도록 한쪽의 나무 껍데기를 깎아낸2다.

이렇게 가공을 해주는 이유는 나무의 재질 구조 때문이다. 나무의 바깥쪽 껍데기는 탄성이 좋다. 반면, 나무의 안쪽은 압력에 잘 버틴다. 따라서 궁사가 활을 쏠 때 나무의 바깥쪽 껍데기 방향(D자 단면의 불룩한 부분)이 적 쪽으로 가도록 잡고 쏘면 탄성에 의해 화살이 멀리 날아가면서도 활이 잘 부러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활의 양 끝에 뿔로 만든 활고자를 장착하거 활끈을 끼우면 장궁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궁의 사정거리는 180야드 ~ 270야드(유효 사정거리는 75~80야드 정도)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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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로즈호 전시관 맨 앞에 전시되어 있는 인양된 검. 브로드 소드(Broad Sword)로 보인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14~15세기 잉글랜드의 장궁수는 보통 1분에 10발 가량의 화살을 쏠 수 있었으며, 숙련자는 그 2배인 20발은 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보통 장궁수는 60개에서 72개 정도의 화살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마음놓고 마구 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격력 증가를 위해 다양한 종류의 화살촉을 사용하기도 했다.

『Braveheart(1995)』의 한 장면.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땅에 꽂아 놓은 화살을 집어들고 있다. 이렇게 하면 화살통에서 집어서 쏘는 것보다 더 빨리 쏠 수 있다.

참고문헌


  1. 4피트 ~ 6피트 정도. 하지만 잉글랜드측 사료에서는 "제대로 쓰려면 5피트 이상은 되어야 한다." 고 기록하고 있다. 

  2. 단, 메리 로즈 호에서 발견된 장궁들의 경우 단면을 D자로 가공하기까지는 하지 않았고, 나무 껍데기만 걷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