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인간, 묘하게 흥미가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겁니다. "조선왕조를 지키기 위해 고국분투하다가" 결과적으로 나라를 말아 먹지 않나, 엄청난 효자에 고종의 총신, 게다가 성실한 관료에 서예가까지...
정말이지 인간이란 동물은 알기 힘든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쁜 놈이지만, 인간이라는 면에서 웬지 기이한 매력이 있는 건 숨길 수가 없네요. 아래 내용은 야후! 구냥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이완용 이넘을 알고싶다
매국노와 충신, 두 얼굴의 사나이 - 이완용

1858~1926. 호는 일당(一堂).
친미 - 친러 - 친일 행각을 거듭한 다채로운 경력의 정치인. 을사조약을 승인한 5인방 중 하나이자 한일합방의 주역.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주도한 친일파인 동시에, 최후까지 조선 왕조에 충성한 충신이자 지극한 효자이기도 했던 두 얼굴의 인물.
인간성
친미 - 친러 - 친일으로 이어지는 변절 와중에도 그는 일관된 소신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부모에 대한 효, 왕에 대한 충, 가족과 친인척을 위한 부의 축적이었음. 그는 유교적 이념과 왕정체제의 옹호자로 평생 부모와 왕실에 극진한 정성을 쏟음.
사실 밑줄 친 부분은 이완용만의 전매특허는 아닙니다. 근대적인 민족의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의 양반들 대부분은 저런 식의 베이스를 머릿속에 깔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이 넘들은 조선왕조가 망한 뒤 일본이 내린 돈봉투를 받고 입을 다무는 치사한 짓을 합니다.
전통적인 귀족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과거 급제를 통해 공직에 나선 명문가 출신 엘리트 관료 . 전형적인 선비형 인물로 주색을 멀리하고 집안에서 서예와 독서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짐. (이완용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서예가이기도 했음.)

알려진 것과는 달리 권력욕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 유교적 전통에 집착하는 보수적 성향을 보임. 효성이 지극해 부모의 병환이 있을 때마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려 했고, 부모의 별세 후엔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음. 특히 한일합방 후 몰락한 조선왕실에도 지극 정성을 보임.
재물욕은 상당해서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알렌을 통해 미국의 이권 개입에 적극 협력, 개인적인 부를 획득함. 다른 이로부터 거액의 돈을 빌려 갚지 않은 적도 있으며, 한일합방 후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었음에도 납세 일부를 거부하기도 함. 근대화 개발 시절을 틈타 부동산 투기에도 열성적이었음.
극도로 신중해 말수가 적으며 주변 의견을 많이 포용하는 인물로 알려졌으나 , 소신이 강하고 과감한 결단력을 보인 것으로도 유명.
사실들
경기도 우봉 이씨의 가난하고 힘없는 선비 집안에 태어났으나 , 10살 되던 해에 먼 친척이자 당시 손꼽히는 명문가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감.
1887년 미국 주재 공사관 관리로 임명. 미국에서 영어와 선진문물을 습득하고 대표적인 친미파 관리가 됐으나, 다른 친미파들과 달리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유교와 불교를 신봉함.
1890년 주미 대리공사로 2년 근무 뒤 귀국, 조선에 개혁적인 정책을 주도함. 성균관을 개편, 지리, 산술, 과학 등 선진 기술을 위한 과목을 신설하고, 정기적인 시험 제도, 기본적인 의무교육 제도까지 완비. (이때 이완용이 완비한 소학교 의무교육제는 오늘날 초등학교 의무교육의 근간이 됨.)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신문 및 독립협회의 "큰손"이었음: 그는 독립신문의 가장 거대한 후원자였으며, 독립협회의 위원장직을 맡은 뒤 창단식에 참가해 독립문 현판의 글자까지 직접 새김. 이완용은 수년간 독립협회 위원장, 부회장, 회장으로 활동한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하나였음.

이완용은 양아버지인 이호준으로부터 실질적인 재산을 물려받지 않았음에도 공직에 있으면서 매일 10리 이상의 거리를 걸어 문안인사를 드렸으며, 이호준의 별세 후엔 벼슬에서 물러나 3년간 묘소를 돌봄. 그 뒤 선친의 제삿날엔 출근도 거부한 채 종일 의관을 갖추고 정성을 다함.
원래 이완용은 조선 내각에서 가장 강력한 반일 세력이었음. 그러나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대승한 후 친일로 돌아서 매국의 길을 걷기 시작함.
아마도 "일본에게 안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란 생각을 이 때 한 모양. 한국에서는 "잊혀진 전쟁"이지만 러일전쟁은 일본이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결정적 계기였음.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가장 총애 받는 조선인이었음: 이토를 자신의 "스승"이라 공언하고 극진히 따름. 이토가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을 때, 서울 시내 4일 동안 가무음곡을 금지시키고 조의를 표하도록 명함.
대표적인 친일파이었음에도 일본말을 거의 할 줄 몰랐으며 , 이토 히로부미 이외엔 제대로 아는 일본인 실세도 없었음.
1909년 큰 아들의 아내 임부인과 "사통"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일부 언론에서 이를 기정사실화 하기도 함. (큰 아들 승구는 일본 유학 뒤 귀국했을 때 아버지가 처의 무릎을 베고 누운 것을 목격하고 "이제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했으니 내가 죽지않고 무엇을 하겠는가"하며 자결했다고 함. 그러나 실제로 승구는 을사조약 이전 병으로 죽었고 소문은 낭설이었음.)
아직도 "이완용이 큰며느리를 강간했다"는 걸 믿는 사람들이 있죠...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왕위를 순종에게 이양시킴: 여기서 이완용이 고종에게 칼을 빼들고 이양을 협박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완용의 집은 물론 조상의 신주까지 성난 군중 손에 불살라짐.
한국인으로 한국인을 토벌하는 헌병 보조원 제도를 제안함 : 당시 조선 의용군의 저항이 거세지자 일본에 대한 반감을 줄이고 한국민끼리의 불화를 조장하기 위해 조선인을 헌병으로 고용, 같은 민족을 살해 감시 고문케 함.
...딴에는 저것도 애국이라고 믿었으렸다?(휘청)
1909년 일진회의 한일합방 요구에 반대 공작을 펼쳤으나, 결국엔 자신이 일본에 먼저 한일합방을 제의하게 됨. (당시 일본은 조선인의 완강한 독립운동으로 한일합방에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으나, 이완용의 제의로 "그물도 치지 않았는데 고기가 먼저 뛰어들었다"며 반색.)
1909년 이재명의 습격으로 왼쪽 폐에 치명적인 자상을 입음. 이때 폐에 뚫린 구멍 덕에 이완용은 평생 고통 받고 결국 말년에 폐렴으로 사망함.
1910년, 한일합방 조약에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함. 그의 서명으로 조선왕조는 5백 19년 만에 공식 멸망하고, 이완용이란 이름 석자는 매국의 대명사로 기록됨.
한일합방 후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과 순종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극진한 예우를 갖추었으며 , 종친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왕실을 보살폈다. 특히 일본 황제에 바치는 선물이 있으면 그에 버금가는 선물을 조선 왕실에도 바친 것으로 알려짐. (마찬가지로, 이완용이 피습으로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고종과 순종은 하루도 빠짐없이 시종을 보내 경과를 물었으며, 거액의 위로금까지 챙겨줌. 이후에도 때마다 칙사를 보내 굳은 일 기쁜 일을 함께 했음.)
얼씨구...
일본황제에 대한 충성 또한 극진했음 : 천황에게 조선 대표로 정기적으로 문안인사를 올렸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 조선에서도 대신들을 모아 두고 심심치 않게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3.1 운동이 격화되자 대다수의 친일파는 겁에 질려 일본으로 도망갔으나 이완용은 홀로 무력 진압을 염려해 3차례에 걸쳐 대민족 경고문을 발표함.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민족의 독립운동에 침을 뱉은 꼴이 되었고,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어 일제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을 야기함.
어록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하기에 달려 있다…"
- 독립협회 창립 총회에서의 연설문 중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 을사조약 체결 직전 매국 발언
"세상에서 처신하기 힘든 일이 세가지가 있다. 쇠약한 나라의 재상과 파산한 회사의 청산인, 빈궁한 가정의 주부가 그것이다."
-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모두 나를 민족반역자, 매국노라 욕하는데 지금 독립운동에 참가한다고 애국자라 하겠는가"
- 손병희로부터 3.1운동 직전 민족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의외로 소신파?[머엉]
"미국인들은 마음 속으로는 조선인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하더라도 밖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는데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한 멸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현실에선 진정한 내선인 융화는 이뤄질 수 없다."
- 일제 총독 관저에 제출한 조선 통치에 대한 의견서 중
...이 인간, 진심으로 얘기하고 있어!!
죽음, 그 후
1926년 이재명의 피습에 의한 상처가 악화돼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둠. 병원에 도착한 이완용은 죽음을 예감, "지금부터 두 시간 후에는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니 이제 약을 권하지 말라"고 말하고 2시간 뒤 사망.
이완용의 장례식은 고종의 장례식에 버금가는 대행렬을 이룸. 일제는 이완용 장례식을 기록 영화로 만드는 코미디를 연출함.
이완용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일본에 충성했고,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됨. 1949년 반민 특위는 재산의 절반만 몰수하는 가벼운 처벌을 내렸으나, 이완용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돌팔매를 맞음.
장손 이병길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그의 동생 병주는 돌팔매와 손가락질을 견디다 못해 일본으로 이민, 병길의 아들 이윤형마저 캐나다로 이민을 감으로써 현재 이완용의 직계 자손은 한반도를 모두 떠난 상태. (캐나다로 이민간 이윤형은 1992년 증조 이완용의 땅을 되찾고자 소송을 낸 것으로 유명함.)
특히 1979년엔 이완용 부부와 그의 아들 이항구 부부의 묘가 증손자 이석형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게 됨. (이완용 가족묘는 1970년대까지 숱한 테러를 당함.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까지 묘를 부수고 짓밟았을 정도. 이에 견디다 못한 증손이 묘를 폐쇄하고 시신을 화장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함.)
참고자료
"이완용 평전(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윤덕한 지음, 중심, ISBN 89-950404-1-6
웹진 한국현대사, 친일파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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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이 글을 보다 보니 정말 웃기는 리플들이 많이 달려 있어서 소개합니다.
[ b2winus ] 이완용이 인간성 좋았고 지식인이었다는게 매국의 핑계는 될 수 없습니다. ... 이완용이 희대의 성자였다 하더라도 조선을 일본인 손에 넘긴 장본인이라는데에는 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누가 그걸 부정했니?
[ lgkorea1957 ] 친일파 정말 청산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친일파 청산 작업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왜 박정희, 전두환시절에는 말도 못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일제시대에 살았더라면 내 소견에는 친일파 하고도 남을 것이다.
// 시사저널에 실린 진중권 씨 칼럼을 인용해서 답해 줄까.. "그건 당신들이 수적 우위를 이용해서 말도 못 꺼내게 해 왔기 때문이다."
[ 210.180.119.204 ] 친일파 명단 발표가 되니까 친일파 후손넘들이 뇌물먹이면서 이런 기사 올려달라 했나보네
// 니 생각의 근거를 대 보시오. 그럼 저 인용자료를 쓴 사람들도 친일파 후손한테 돈 먹고 쓴 거요?
[ getbbaram ] 그시대 그환경에서 어떤선택을 했겠느냐구?
나참 기가 막힌다.
그당시 자결한 사람들은 그렇다면 무어냐. 목숨바쳐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무어냐.
친일파 개종자들이 판치는 대한민국~~
// 누구나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착하게 살지만은 않는 게 현실이지.
그 "배운 대로 살지 않는" 인간의 현실을 이야기해 보자는 게 친일파 개종자면 넌 뭐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