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C와 함께 살아가기

IT/리뷰 by 고어핀드 2006/03/17 12:27
온라인 게임이 줄 수 있는 특이한 매력 중 하나는 "내(게이머 자신)가 지금 다른 세계에 와 있다" 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간단히 말해 워크래프트 세계의 역사를 읽으며 좋아하던 워크래프트 팬은 WOW를 하면서 헬스크림의 무덤에 가보고,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전투에 참여하며, 스톰윈드 성에 자리잡은 영웅들의 동상을 보고 오크의 대족장 스랄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이입은 모든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특징입니다만, 게임은 쌍방향 매체라는 특성상 이 점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헐리우드 영화의 경우 이것을 구현하기 위해 7분 내에 무지막지한 볼거리를 만들어서 사람이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하는 테크닉을 구사합니다.)

이 얘기를 왜 뜬금없이 꺼내느냐 하면, 대항해시대를 하면서 만난 NPC들 때문입니다.

저 이름, 어디서 많이 보던 거 아니셈?

보통 어떤 게임이 후속작이 나오면 전작보다 발전된 구석이 있어야 하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전작의 장점이라면 더더욱 그래야죠.

대항해시대의 전작들은 패키지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 라는 느낌을 주는 데는 본좌급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사실을 게임속에 녹여넣는 데 본좌급의 솜씨를 자랑하는 KOEI의 솜씨도 한 몫 했지만, 대항해시대 특유의 NPC들이야말로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대항해시대에 등장한 NPC들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대항해시대2에서의 잉글랜드 해군 대장 옷토 스피노라는 대항해시대 외전에서 알제 해적을 토벌하는 함대 대장이 되어 하이레딘 레이스의 아들, 살바도르 레이스와 싸우게 됩니다. 대항해시대1의 주인공 레온 공작의 아들 조안 페레로는 2에서 붉은머리 여해적, 카탈리나 에란초에게 쫓기게 됩니다. 쫓기던 페레로를 투르크의 상인 알 베자스가 구해주죠. 베자스는 외전에 가보면 이스탄불에 알 베자스 고아원을 차렸더군요. 역시 이 녀석이다. 그걸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이 인간덜.. 기억하십니까?

또 하나는 주인공이 아닌 동료들이었습니다. 이 동료들은 한 번 파티원이 되었다가 사라져가는 흔하디 흔한 1회용 캐릭터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하며 움직이고, (대항해시대의 스토리가 일직선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제대로 플레이 안하신 분들입니다. 게임의 큰 줄기는 변함이 없지만, 세부 이벤트는 플레이 할 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교육을 시키다 못해 아예 항해 매뉴얼까지 쓴 털복숭이 로코. 4편에서 아이템으로 입수할 수 있습니다.

어느 새 전설의 인물이 된 로코

이렇게 가상세계에서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은 실제 역사를 교묘하게 따라 나가는 스토리와 함께 대항해시대 게임 속의 세계를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그런 게 죄다 없어졌습니다. 기존의 주인공들은 그저 흔하디 흔한 몹일 뿐입니다. 대항해시대 특유의 재미가 없어져 버린 것은 정말이지 실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정확한 시대배경이 맞지 않아서 전작의 모든 캐릭터가 등장할 수는 없었겠지만, 하다못해 어쩌다 스피노라와 관련된 사람과 만나서 해전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던지, 알 베자스가 세운 고아원에서 자란 투르크 상인과 만난다던지 하는 이벤트만 작게 삽입해 줬더라도 이런 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다못해 이 바보 커플만 나와줬더라도...

KOEI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KOEI 입장에서는 일본에서는 엄연히 마이너 장르인 온라인 게임보다 콘솔용 게임이 더 중요하고 그러니 좀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이 꺼려졌던 것일까요? 그 돈과 시간, 인력을 "인왕(仁王)"에 투입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을까요?

사실이 어떻든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항해시대는 제 인생의 게임이었고 제가 게임 제작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된 작품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전히 대항해시대는 재미있지만, 뭔가 중요한 게 없어졌어요.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추가>
대항해시대4의 경우는 아이템에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죠. 게르하르트가 옛날에 쓰다가 잃어버린 칼이라던가, 붉은머리 여해적의 보검(^^*) 등등. 아이템 하나 만드는 데에도 세세한 관심과 정성을 기울인 게 보입니다.

2006/03/17 12:27 2006/03/17 12:27
태그 ::

http://blog.gorekun.com/trackback/834

블로그이미지

About
고어핀드

기본적으로 댓글에는 모두 댓글을 달아 드립니다. 단, 제가 시간이 없어서 많이 늦어질 수가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Recent Trackback

1194800
Today : 365   Yesterday : 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