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갑옷 전시실(Emma and Georgina Bloomberg Arms and Armor Court)에 소장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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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flickr@charlestilford)

우리는 중세라고 생각하면 반짝이는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전사들을 떠올립니다만 이런 멋진 모습을 위해서는 갑옷 손질이라는, 지저분하고 힘든 "삽질" 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개삽질이 고귀한 기사가 할 일은 아니니 당연히 누군가에게 떠맡겨졌는데, 역사는 이들을 "갑옷담당종자(Arming Squire)" 라 부릅니다. 요즘 F1 레이싱을 보면 한 명의 레이서가 탄 차에 열 명이 넘는 정비원들이 달려들어 자동차를 정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기사들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중세 기사의 정비원"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이 갑옷담당종자였습니다.

독일 뉘른베르크의 갑옷 장인 Kunz Lochner(1510-1567)가 제작한 갑옷. 1548년작. (출처: flickr@unforth)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중세의 전쟁은 몇 분 정도만에 끝나는 간단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전쟁은 요즘처럼 대포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천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투라도 한 번 벌어지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몇 시간이 넘게 온 들판을 뛰어다니며 싸우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기사는 한 판 싸우고, 잠깐 돌아와서 물 좀 마시고, 또 싸우고... 만 반복하는 겁니다. 문제는, 중세 기사의 갑옷이란 안전한 대신 입고 벗기가 굉장히 힘든 물건이라는 거죠. 볼일 좀 보려고 이것 벗었다 입었다 할 시간은 없으니까, 당연히 그냥 참거나 싸우면서 그 자리에 싸는 겁니다. 기사가 겁에 질리면(?) 더했겠죠.

위 갑옷의 말투구 부분을 확대한 사진. http://www.flickr.com/photos/unforth/2820154042/

전투 환경도 하등 나을 바가 없어서, 진흙탕에서 말과 사람이 뒤엉켜서 싸우니 엉망인 것은 당연했고, 전투가 여름에 벌어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오랜 시간 뛰어다니면 흘린 땀도 미칠 지경이었습니다.(가만히 서 있어도 흐르는 땀에 죽을 판인데 -_-..)

결국 기사의 갑옷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반짝반짝한 물건이 아니라, 전투 한 판 치르면서 제구실을 하고 나면 땀, 진흙, 오물이 뒤범벅이 된 무지막지한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갑옷담당 종자는 이 엉망진창인 갑옷을 깨끗하게 닦아 정비하고, 관리하고 전투 직전에는 주인에게 입히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갑옷 닦는 일이 뭐가 힘드냐구요? 마실 물도 귀한 전쟁터이다보니 물로 못 닦고 모래, 식초 그리고 약간의 오줌을 섞어서 만든 연마제로 갑옷을 닦는 겁니다.

제작자 미상의 또다른 갑옷. 기사 갑옷은 1575년, 말갑옷은 1560년 경의 물건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 아마도 밀라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www.flickr.com/photos/frandrakesphoto/2393373514/

여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니, 종자는 주인의 말도 관리해야 했고 식사 시중도 들어야 했습니다 - 이 과정은 귀족들의 에티켓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사가 끌고 온 하인들과 몇몇 병정들을 감독해서 천막을 치고, 기사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무보수 매니저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혐오스럽고 힘든 직업을 평생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겁니다. 이 일은 기사 계급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견습인 어린 소년들에게 맡겨진 일이었거든요.

참고문헌

Tony Robinson, The Worst Jobs in History, Macmillan UK, 2007

(신두석 역, <불량직업잔혹사>, 한숲, 2005):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 온 최악의 직업들을 다룬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