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좌파의 눈으로 세상 보기 - 김규항(* 좀 깁니다.)
* 이 글은 2006년 5월 15일 고려대에서 있었던 김규항씨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근대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봉건제의 예속을 끊어 농민을 노동자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자유가 필요했다. 프랑스 혁명은 부유할 수 있는 자유와 더불어 가난할 수 있는 자유를 동시에 주었다. 비슷한 논리로, 70년대 신자유주의가 대두할 때 한국은 강력한 군사 파시즘 국가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을 개방시키려면 민주주의 제도가 자리 잡을 필요가 있었다. 한국에서 87년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얻어 낸 결과는 신자유주의화다.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폄훼하려는 뜻이 아니다. 문민정부가 세계화는 좋은 것이라 부르짖었을 때 경계했어야 하는데, 진보 진영은 동구권 붕괴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때 신자유주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학자에 따라 아직 완성되어 가는 중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사회가 되었다. 이는 고단하고 황폐해져 가는 우리 사회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월드컵이나 신형 핸드폰, 자동차 같은 것들이다.
2004년의 탄핵은 이러한 상황을 은폐하는 대형 퍼포먼스였다. 한국 사람들은 군사 파시즘에 대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어서,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구도를 재현하여 ‘그들’이 돌아온다고 선동하면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다. 북한이 이제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듯이 수구 세력이 역사를 퇴행시킬 능력은 없다. 지금 가장 힘을 얻고 있는 세력은 개혁 우파다. 조갑제와 지만원의 선동은 미학적으로 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극우 세력은 이제 사회의 한 구획으로 모이고 있기 때문에 부각되고 있을 뿐이다. 선풍기의 전원을 껐을 때 날개가 당장에 멈춰 서지는 않는다.
다만 월드컵과 황우석처럼 국가주의가 판치는 현상은 아직 남아 있다. 만약 유럽에서 한국처럼 TV 광고에 국기가 휘날리며 애국심에 기대어 상품을 판다면 굉장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16세기에 한 스페인 선교사는 인디언들도 유럽인과 똑같은 사람이며 오래 전부터 그들의 방식으로 오히려 백인들보다 하느님과 더 잘 대화해 왔다고 주장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인디언을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식민지 개척의 정당성을 잃기 때문에 그 선교사는 진실 따위 때문에 국익을 저버린 놈이 되었다.
지금 평택은 광주와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공수부대가 투입되었을 것이다. 평택 문제의 본질은 미국의 동북아질서 재편이다.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전력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기지를 확장 이전하면서 미군의 성격이 공격적으로 변환되고 있다. 미국은 초국적 기업의 본거지이고, 미국의 이러한 전략 수정은 신자유주의의 일환이다.
80년 광주 항쟁의 경험을 통해 진보 운동은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그전까지 진보 운동을 이끌던 사람들은 국가에 노출되면 무조건 간첩으로 몰렸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 자신도 스스로 반공주의자라고 실제로 믿었다. 80년 이전 운동의 목표는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계엄군이 광주를 짓밟는 동안 미국의 항공모함이 한국 근처로 온다는 정보를 들은 사람들은 미국이 시민들을 도우러 온다고 착각했다. 미국은 한국의 신군부를 안정화시키려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몇 달 사이에 운동은 더 급진적으로 변하였다.
80년에서 87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운동의 목표는 민주화가 아니라 혁명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순수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말하였으나 실제 목표는 체제 전복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생각이 깊고 진지한 사람은 모두 사회주의자였다. 전쟁이 끝나고 문인들은 술판에서 쭉정이만 남고 알맹이는 없어졌다며 자조했다 한다. 그 후 광주 항쟁 전에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는데, 80년대 중반에는 레닌 · 스탈린주의자까지 출현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체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돈이 있으면 사랑과 존경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아이들은 더 이상 돈 없고 정직한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수구 세력은 막아야 하지 않느냐는 기만적인 말들을 하고 있다. 정권은 극단적 우파에서 보기 좋은 우파로 넘어 갔을 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네티즌이라는 얘기를 한다. 그들이 떠드는 내용은 고작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체제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꼭두각시 노릇이다.
(후략)
출처:
대화를 꿈꾸는 독백1.
난 김규항이라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싫어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난 진보 지식인 김규항을 고등학교 때, 그가 딴지 총수 김어준과 진행한 한겨레 21의 쾌도난담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그 이후에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을 씹은 걸 보고 아주 싫어졌다. 나도 삼성이 소위 돈x랄 하는 것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김규항의 글은
그것보다 더 꼴보기 싫었다.나중에 김규항의 블로그를 조금 더 찬찬히 읽어보면서, 김규항이 더 싫어졌다. 뭐야 이 인간.
돈 없는 세상, 사유재산 없는 세상이라도 꿈꾸고 있나. 도대체 그게 말이 되냐? 그런 식이니 서점에 갔다가 "고래가 그랬어" 라는, 그가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를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재수 없어.
내가 이 조갑제 뺨치는 혐오감을 가지게 된 데에는 내가 김규항의 현실인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된 것 같다. 블로그와 같은 인터넷 매체는 쉽고 자유로운 의견의 개진이라는 장점을 갖지만 뒤집어 말하면 가볍고 파편적인 메시지만 전달될 가능성이 99%다. 미디어가 메시지를 정의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는 김규항이 쓴 글도 많이 읽은 게 아니고, 블로그에서 본 게 거의 다였다.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건 당연하지.
2.
최근
永革님이 정리해 올린 5월 15일 고려대에서의 김규항 강의를 읽었다.(위에 실린 글이다.) 아마 스승의 날에 뭔가 강연회 같은 걸 준비한 모양인데, 개인적으로 이 글을 추천하는 바다. 이 글 한 편을 읽음으로서 김규항이라는 인간이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그 사상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등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한국현대사 인식 - 7,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 은 상당히 걸물이다. 요즘처럼 대통령 투표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는(아니면 체육관에서 투표한답시고 생쇼하는 개꼴을 들어본 바 없는) 개념없는 대학생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개념글이랄까.
물론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다. 이 글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김규항은 민주화 이후로 도래한 돈이 중시되는 사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나는 돈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개개인의 욕망 하나하나가 존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만 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걸 다 할 수 있다는 것, 난 그게 마음에 든다.
그런 자잘한 차이점을 제외하면 이 강연은 대체적으로 강연자의 생각이 짜임새 있게 정리된,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 주는 꽤나 좋은 강연이라고 생각한다. 은근 부러워진다. 고려대.
3.
그럼 내가 이 글을 읽고서 김규항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냐고? 전혀. 김규항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조금 더 납득하게 되었다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일 것이다. 아무래도 돈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B급 진보지식인 김규항은, "눈으로 수요와 공급을 보고 입으로 투자와 이윤을 말하는" 나 같은 부류의 인간과는 상극인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애시당초 농촌 출신에(*1)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사람과 서울 남쪽 출신에 IMF의 파고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사람에게는 뭔가 말도 통하지 않는, 메울 수 없는 생각의 괴리가 있는 것 아닐까.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을 가로막는 원초적인 장벽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2)
언젠가 김규항이 쓴 글에서 이런 문구를 본 것이 기억난다. "직접 만나봐서 나쁜 사람이 어디 있냐?" 그래, 나 들으라고 한 소리였구나.
*1) 김규항의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이 빈민 구제랍시고 던져준 허접한 농토에서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걸 어떻게 아냐고? 의사들 파업할 때 김규항이 씨네 21인가에 쓴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2) 그래서 강남 부자들이 끼리끼리 결혼하고 노는 건가?
http://blog.gorekun.com/trackback/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