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br /> ...이제 그만 와요. 전염되. / 전 괜찮아요. 옷을 고쳐왔어요.
"에로스"는 왕가위, 스티븐 소더버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세 감독이 "에로스"를 주제로 각자 제작한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 "손(手, Hand)"은 간단히 이야기해 멜로물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나오는 멜로물뿐만 아니라 온갖 영화에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든 로맨스에 질식할 지경인 요새 관객들에게 또 웬놈의 멜로물이냐 싶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다르다.
1960년대의 홍콩. 양장집 견습 장진이 고급 콜걸 화이바오에게 불려간다. 특유의 묘한 분위기에 엉거주춤한 장진. 약간은 퇴폐적이고 고압적인 태도의 화이바오는 장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여자 몸도 모르면서 어떻게 여자 옷을 만들겠어? 앞으로 이 감촉이 영감이 되어 줄거야."
이후 소년 장진은 10여 년 동안 이 여자를 위해 화려한 옷을 재단하고, 가봉하고, 배달해 준다.
영화는 10여년의 세월 동안 전담 재봉사와 단골 손님으로서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 시간동안 장은 나름 돈도 벌고 출세도 하게 되지만, 화이바오는 별 볼일없이 늙어갈 뿐이다.
왕 감독은 간접적인 묘사로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지극히 절제된 대사와 화면이지만, 세세하고 사소한 곳에서 화이바오에 대한 장의 흘러넘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촬영 당시 사스의 영향으로 현장에서는 악수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스침의 소중함이라는 작품의 테마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는 인간의 오감 중에서 촉각이 가장 두드러진 영화가 되었다. 장진이 기억하는 한 순간의 스침. 장진이 화이바오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마지막 순간에 마음놓고 입맞춤도 할 수 없는 두 사람을 이어 주는 것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촉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피부로 전해지는 따듯함, 혹은 맞잡은 손 너머로 느껴지는 작은 심장의 울림,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만 날 잊고, 진짜 사랑을 찾아 봐요..."
사랑은 닭살스러운 대사가 등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관계는 노출신이 없어도 충분히 에로틱하다. 말없는 시선의 힘을 느끼게 해 주는 감성이 풍부한 영화다. 누군가 왕가위를 "멜로물을 가장 잘 찍는 감독"이라고 했다는데 이 영화를 보고 보니 그의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어졌다. 멜로물은 안 보는 나일지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