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불변의 법칙

2006/06/30 02:41
* DCINSIDE 역사갤러리 블로그(속칭 역갤블로그)의 롱보우와 화승총에 대한 글 하나를 보고 생각난 김에 포스트.

조선왕조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생각들 중 하나가 바로 "지나치게 문약하여 국방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이 문치주의로 흘러 총과 같은 새로운 무기의 개발 등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결과적으로 국방력이 약해지고 망했다는 것이 이러한 생각의 기본 얼개다. 그런데, 과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단순할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은 요즘 세계에서 가장 국방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나라일 것이다. 온 국민이 다 군대를 가고, 총을 들고 실전 배치된다. 온 나라가 다 전방이다보니 실제로 전투경험을 하는 사람도 많고 자연히 전사하는 사람도 많다. 국방비도 엄청나게 쏟아붇고 미국이 개발한 최신 무기는 항상 이스라엘이 먼저 구입한다.

여자라고 예외일쏘냐...

[관련기사] 이스라엘 여성의 군복무

그런데 이 "군사 국가" 가 패배를 당했다. 1973년의 제 4차 중동전 얘기다. 결국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전차군단과 전폭기들을 엄청나게 잃은 후였다. 이집트가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스라엘이 보유한 전폭기와 전차들은 그동안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것만으로 충분해" 라고 생각하고, 전차군단과 전폭기를 충분히 보유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집트가 이걸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지난 전쟁에서의 패배 원인을 면밀히 분석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전차와 전폭기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전쟁을 해 볼 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들고 나온 게 보병용 로켓포 RPG-7과 SAM 대공 미사일이었다. 당시 전차는 요즘 전차와는 달라서 철판 장갑을 썼다. 이집트 군이 보병에게 쥐어 준 로켓포는 이스라엘군의 전차를 스위스 치즈처럼 숭숭 구멍을 냈다. 반격하러 나온 이스라엘 전폭기들은 이집트군 기지에 설치된 SAM이 박살냈다.

전쟁사 불변의 법칙 - "패배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전쟁의 역사를 흔히 "무기들간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 라고 한다. 어떤 무기체계가 승리하면 한동한 이것이 주류로 사용되다가, 이를 근본부터 뒤집는 새로운 무기체계가 등장하는 것이 전쟁의 역사였다.

전쟁사학자 존 키건은 이를 "승리한 군사제도란 영광의 순간에 고착화된다." 고 표현했다. 전쟁무기는 생존에 직결된 것인 만큼, 그것에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구태여 이를 바꾸려고 하는 모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임진왜란에서 초반에 밀리고, 훗날 근대화된 군대를 지니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문약함, 국방에 관심이 없음 때문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방 문제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셀 수 없이 잦은 전란으로 많은 군사적 혁신이 이루어진 유럽과 전국시대의 칼부림을 거친 일본과 달리 조선왕조는 소수의 왜구와 여진족을 제외하면 전쟁이 별로 없는 나라였다. 따라서 기존의 무기 체계를 혁신할 필요가 없었다.

임진왜란 초기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다. 우리가 보기에 대량의 조총을 소지한 일본군에게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는 것은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립의 머릿속에 있는 조총 이전의 전쟁방식에서는 기병들이 전력으로 돌격해서 적진을 유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신립은 바로 그 여진족 토벌에서 공을 세워 출세한 사람이다. 그는 치고 빠지는 여진족 경기병은 알아도, 조총의 일제사격이 뭔지 몰랐다. 이 전술은 일본에서도 최신의 전술이었으니 신립 탓은 아니다. 생에 마지막 출진에서도 그는 "기병들만으로도 충분해" 라고 생각했을것이다. 자기가 키워 놓은 정예의 함경도 기병들이 없다는 점은 좀 껄끄러웠겠지만.

결국 문제는 환경의 차이


일본군도 별로 다르지 않다. 대포는 틀림없이 조총에 비해서 압도적인 무기이고, 대단히 유용하다. 하지만 그 "전쟁과 무기에 관심이 많다는" 전국시대의 일본인들은 대포를 사용할 줄 몰랐다. 왜?

간단했다.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 시대의 전쟁에서 커다란 대포를 끌고 다니기는 지극히 불편했고, 또 비쌌다. 그리고 대포로 부숴야 할 것도 별로 없었다. 일본의 성은 나무 울타리로 만든 산성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오오즈츠(大統대통)"라 불리는 커다란 조총으로 성문을 부수기만 하면 대포 없이도 충분히 수비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건 총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크고, 조잡했다(?)

결국 대포를 쓰는 데 서툴렀던 일본 수군은 수백 문의 대포를 앞세운 조선수군에 의해 남해바다의 원혼이 된다. 이후 수백여년간 이어진 평화에 의해 일본의 군사 체계는 사쓰에이 전쟁으로 서양 무기의 뜨거운 맛을 볼 때까지 유지되었다.

* 일본의 대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이 글을 읽어보시길.

Ps> 제 4차 중동전에는 돈이 연관된 후일담이 있다. 궁금하면 여기로.

Ps2> 이건 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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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sipahi 2006/07/01 15:20

    일본의 경우는, 소형 박격포는 있었지만 대전차포나 야포가 없었던 셈이네요. 하기야 뭐.. 순 육군 땅개들로만 갖다 박자면 들고다니기 좋은 박격포가 제일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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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발당 2006/07/01 16:39

    "깨지기 전에는 바뀌지 않는다"는 명제는 군사체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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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드레이크D 2006/07/02 00:57

    좋은 글 입니다만.... 신립의 탄대금 전투 라면 좀... 너무 단순비교가 아니실런지... 조선군의 기병대는 일본군의 조총 부대에게 유난히 강했습니다.(아마 화살의 사정거리가 주요 원인 인듯...) 게다가 신립이 탄대금에 위치한 이유는 군사들의 사기와 제승방략 이라는 조선의 빌어먹을 전술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 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선군 기병대의 기본전술이 적의 사거리 밖에서 장사정의 활을 쏜뒤에 적군대의 전열이 무너지면 기병으로 돌진... 이런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탄대금이 비가온 후가 아니었다면 승부는 어덯게 되었을지 모를 일 입니다. 실제로 신립의 조선병대는 거의 3배나 많은 일본군의 3차례 공격을 막아냈다고 합니다. 이걸로 봐서 그다지 조총이라는 무기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기적인 스펙이 아니라는 점(사실 일본군이 전부 조총을 보유한것도 아니었고 활을든 병사가 더 많았다는것도...;)과 조선군이 무식하게 돌격만 하지 않았다는게 확실 합니다. 조선군의 정예라 할수있는 사군육진의 정예병을 이끌고 충분한 숫자의 병력을 받을수 있었다면 고니시의 1군은 신립에게 패배하고 임진왜란은 조기 종전 됐겠죠... 조선은 전투 초기에 너무 많은 인재를 손실 한것 같습니다. 실제로 경상우수사가 원균이 아니라 이순신 이었다면 임진왜란 이란것 발생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경상우수영의 판옥선은 총 150척이 넘는 대선단 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초기 원균이 제대로만 대처 했더라면 상륙하는 왜군 전체를 통구이로 만들수 있는 숫자죠 그런데 이배들을 모두 자침 시켰으니... 이배들은 후일 이순신장군이 3년이나 걸쳐서 재건하게 되는데 그것도 원균이 칠천량에서 말아먹죠 원균 이놈이야 말로 진정한 매국노...; 말이 딴데로 샜군요... 죄송 암튼 좋은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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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어핀드 2006/07/02 20:31

      음, 저 역시 조총이 사기유닛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식하게 돌격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 역시 압니다만(제 기억이 맞다면 당시 왜병 편제의 30%가 궁병, 15% 정도가 철포병이었을 겁니다.) 주제가 탄금대 전투가 아닌지라 대폭 생략했습니다.

      하지만 제승방략이라는 군사시스템 역시 "소규모 전투"를 위한 전쟁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신립이 충분하지 못한 군대(그것도 훈련도 덜 된)를 이끌고 출정하게 된 것 역시 "패배할 때까지 변하지 않는 군사 시스템"의 예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제 생각에는 설령 신립이 소서행장을 막아냈다고 하더라도 조기 종전까지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소서행장 뒤에는 대규모 왜병들이 상륙하고 북상하던 중이었으니까요. 삼남 지방에서 소집중이던 근왕군과 함경도 기병들이 달려와서 전선이 고착화되기는 했겠지만(그러면 조선 전토가 전쟁터가 되는 개판은 막을 수 있었겠죠) 그 상태로 몇 년동안 지리하게 밀고 당기는 정도였겠죠.

      마지막으로 언젠가 원균 명장론이 대두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글을 써 볼 생각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

    • ... 2009/07/23 18:14

      답글로 넣으려고 했는데 마침 비슷한 글이 있길래 댓글로 넣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일제 사격을 했다는 것은, 메이지 정부의 육군사학자들에 의한 왜곡이라는 것이 일본측 연구자들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전국시대 좋아하시는 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삼단 전법이니, 나가시노 전투니 하는 것들이 모두 쌩 구라라는 것이 요지이지요.
      조총의 가장 큰 이점은 소리가 큰 점이었습니다. 특히 조총에 익숙치 않은 경우는 특히 그렇지요. 조총의 성질상(전후좌우 30m는 떨어져 있지 않으면 불똥이 튄다던지 문제가 많습니다.) 대량 사용이 불가하기때문에, 수비전(일본식 망루,성이나 방책 뒤에서)에 도움이 되는 정도였다는 것이 현대 학설입니다. 임진왜란때에도 물론 조총은 한부대당 수백명 단위 정도로 배치되었을 것이며, 실질적인 주력은 장창부대였을겁니다. 임진왜란 초기 패인을 조총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 부족이 주 원인으로, 고어핀드님이 드신 것처럼 전술(실질적인면에서 사용력)과, 전략(제승방략 등등)에 대해서 일본측에 비해 모자란 점이 주요했다고 봐야겠지요....무엇보다 조선은 상비군의 주력은 북방에 뒀다는 점, 1순위 적은 만주족이라는 인식이 문제겠지요...그런 의미에서 그 누구냐...통신사 부사의 잘못이 크다고 봅니다... 일본군이 침략하지 않을거라고 한...

    • 고어핀드 2009/07/24 13:39

      ... // 오래 전 글에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전에 급히 쓴 글이라 표현 등에서 미진한 점이 많습니다. 이 글은 조만간 대폭 수정할 예정입니다.

      관심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

  4. 蛙童 2006/08/28 06:09

    일본군 수군이 대포를 쓸 줄 몰랐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일본배의 약한 내구성으로 인해 발사 시의 포 진동을 흡수하기 위해서, 종처럼 매달아놓고 쏘는 식으로 포를 운용했지요. 이 때문에 명중률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조선 수군함에 비해 많은 양의 화포를 적재하지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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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어핀드 2006/08/28 23:35

      아예 모른다, 안 썼다기보다는 서툴렀다, 잘 운용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쓴 말이었습니다 :)

  5. 테페리 2007/07/04 21:33

    조선의 평화를 자랑할 바가 못되는 것이지요. 임진왜란때 비참하게 패하려고 사대하면서 유지한 평화라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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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어핀드 2007/07/05 00:23

      글쎄요, 저는 오히려 조선의 평화가 자랑 혹은 수치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저 이미 지나간 사실일 뿐이고, 어찌 보면 당시 사람들로서는 거의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대국에 대한 사대라는 것도 동아시아 특유의 외교 형태이니까요.


      "임진왜란때 비참하게 패하려고 사대하며 평화를 유지했다" 는 것도 이해 불가. 조선 왕조 초기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것을 예측해서 "그 때 일본군에게 깨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명나라에 사대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전 조선의 사대주의를 그리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오히려 일본 전국시대나 르네상스기 유럽의 역동성을 꽤나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치스러워 하지도 않습니다. 뭐 그게 그렇게 수치스러우시다면, "미국에 사대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느니 당장 한미동맹 파기하고 미국하고 맞장 뜨자" 라고 주장하셔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6. 테페리 2007/07/05 16:33

    조선이 평화시기를 유지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밤을 지새운 일본에 패했다고 하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굳이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면 사대를 하더라도 전쟁준비라도 잘 해 놓아서 타국이 침략을 포기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애초에 발전을 포기하고 당장의 평화에 급급하다가 전쟁이 나자 전 국토가 적군에 유린당하게 된 것은 그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그럴 바에야 뭐하러 평화를 유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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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어핀드 2007/07/05 16:58

      본문을 다시 읽어 주시고 리플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역시 (당시의 전쟁 개념으로는)전쟁준비가 꽤 잘 되어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조선이 국방문제에 기울인 관심으로 보면 애초에 전쟁 기술에 대해서 발전을 포기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문두에서 이스라엘 이야기를 한 이유는 상상도 못한 전쟁 방식이 등장하면 이스라엘과 같이 국방에 열중하는 나라도 크게 패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적어 놓은 것입니다.

    • 도라버리게스 2009/09/19 04:32

      조선이 전쟁준비가 안되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웃기는 일인데, 이미 일본이 쳐들어오기 이전에 기존의 군선인 맹선은 판옥선으로 모두 대체되었으며, 북방에서 위용을 떨치던 장군들을 남쪽에 배치해두었고, 성벽을 고치고 병장기를 수리해놓았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의 준비였냐면, 소규모 접전으로 가면, 조선 관군은 일본군에게 살짝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국지적인 스커미쉬에서는 이기는 경우도 많았고요.

      조선도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전쟁 준비한다고 백성들의 삶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준으로요. 다만, 2만명쯤 몰려올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20만이라는 당시로서는 말도 안되는 병력이 몰려와 그야말로 1592년판 "충격과 공포"가 되었기 때문에 밀린 것이지요. 말그대로 20만명이 서울을 향해 닥돌해오니까 충공깽이었던겁니다.

      그 배경을 바탕으로, 초유사 김성일이 경상우도의 행정력을 회복하고, 관군과 의병이 전라도를 지켜주는 가운데에 (특히 이치 전투에서 권율이 일본군을 막지 못했다면 전라수영은 말그대로 후장 털리고 발렸을겁니다.) 이순신 함대가 잇단 해전에서 일본군을 박살내면서 전세가 조선군 쪽으로 뒤집히게 된거죠.

      조선이 문약했다면, 애초에 전쟁이 일어났던 임진년에 17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관군을 동원할 수 없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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