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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전쟁사에 있어서 기사 몰락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요? 보통 화약병기가 등장한 이후로 생각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백년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1302년의 콜트레이크 전투부터입니다.
플랑드르 백작령, 유럽의 노른자 위
중세시대에는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같은 나라는 없었다. 단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에게서 영지를 하사받은 봉신들이 이 지방을 나누어 통치하고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 대략 현재 벨기에 서부의 동서 플랑드르 주를 중심으로 862년 성립한 플랑드르 백작령(Country of Flanders)이 있었다. 그리고 콜트레이크Kortrijk 시는 백작령에 속한 자치도시였다.

콜트레이크 시의 명물, Broel tower의 야경
11세기 유럽은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시작했고, 자연히 이에 따라 교역량도 크게 증가하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플랑드르 백작령은 어느 한 나라에 완전히 속한 영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주요 통상로로서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요새로 치면 홍콩같은 자유무역항 정도가 된 플랑드르에 떼돈이 굴러들어오게 된 것은 정한 이치였다.

물건을 사고파는 중세의 상인들
프랑스 국왕의 야심
이 시기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봉건 영주들의 영지를 빼앗아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자면 영주들이 반발할 것은 당연했고, 프랑스 국왕 필립 4세 Philip IV는 이를 억누르기 위한 무력 - 을 갖추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 필립은 많은 세금을 짜낼 수 있는 플랑드르 백작령에 눈독을 들이게 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미남왕 필립 4세의 봉인Seal

플랑드르의 백작의 문장
그러던 1293년, 가스코뉴와 노르망디의 선원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당시 두 지방 모두 프랑스 국왕의 영토 안에 있던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였다.)이 빌미가 되어 가스코뉴에 있던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들이 잉글랜드 국왕을 프랑스 법정에 고발한다. 지금의 국가 관념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노르망디, 아퀴탱의 영주이자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프랑스 국왕의 문장
에드워드는 법정 출두를 무시했고, 필립은 얼씨구나 해서 군대를 소집했다. 필립의 군대가 가스코뉴를 침공함으로써 129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12세기 말 이미 프랑스에 영지의 서쪽 지방을 빼앗긴 바가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프랑스 국왕에게 영지를 죄다 빼앗길 판이니 - 결국 귀는 1297년 1월 7일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와 동맹을 맺고 이틀 뒤에는 필립과의 주종 관계를 파기했다. 이렇게 해서 분기탱천한(이라기보다 이번에도 얼씨구나 싶은) 필립은 군대를 일으켜 플랑드르를 침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