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 강인한 가부장의 추억

ETC by 고어핀드 2006/07/29 22:18

1.

어떠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는 큰 영향을 준 사건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사람의 뇌리에 남아 평생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행동들을 지배한다. 따라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풀리지 않고 앙금처럼 남은 미완의 기억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도 달라지게 된다.

한국은 가부장 사회다. 유사 이래 거의 항상 그래왔다. 이 당연한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이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미완의 기억을 주었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가부장이 없는 역사였다. 근 이천년동안 아무도 의심한 바 없는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자애로운 상감님" 이 순식간에 골로 갔다. 그리고 백년동안 이 상처를 치유할 기회는 없었다. 수천만 명이 이러한 경험을 공유했다.

그만큼 대중들의 "강력한 가부장" 에 대한 미완의 기억은 깊고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아시스를 찾는 목마른 캐러밴처럼 항상 강력한 가부장을 찾아 헤멘다. 지금도 민주주의 국가의 행정 수반인 대통령을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유교적 상감마마와 구분하지 못하고 "강력한 지도자" 를 외친다. 혹 일부는 찾아냈다고 믿기도 한다. 그것이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이건, 사이비 교주이건 간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불안함을 떨치고 안정감을 얻는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우석의 업적에 대중들이 엄청나게 열광한 것도 불치병 환자들이 일어설 수 있다는 인류애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인류애가 넘쳤으면 아마도 사후 장기기증자가 수레로 실어내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아마도 대중들이, 황우석에게서 "한국인도 과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유능한 가부장" 혹은 "수십조의 돈을 벌어와 배고픈 아이들을 배부르게 먹이는 아버지" 의 이미지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못 믿겠다고? 의심스럽다면 과거 줄기세포 관련 뉴스에 달린 리플들을 꼼꼼이 다시 살펴보라. "정치꾼들이 망친 나라를 박사님께서 일으켜주십시오!!" 와 같이 무능한 가부장을 대체할 유능한 가부장에 대한 소망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황박사에게 가장 먼저 제기된 윤리 문제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국민적으로 "다굴" 당한 것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우리 아빠 욕하지 마" 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해석하면, 그건 무리일까?

아마도 황박사 업적의 허상을 믿지 못하고 "무능한 가부장이 음모로 유능한 가부장을 살해했다." 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기껏 찾아낸 유능한 가부장에 의지하고픈 심리의 반영물일지도 모른다.

2.

대중 문화는 대리 만족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명제와 앞의 내용을 엮어서 결론내리자면, <한반도> 는 강우석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훌륭한 "오락물" 이다. 영화계의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강우석 감독은 대중의 취향을 정말 잘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산낙지처럼 꾸물거리는 그것을 한번에 움켜쥐고 날것 그대로 쑥 내밀 줄 아는 사람이다.

장감컨대, 영화가 상영되는 두시간 반여 동안 관객은 "대중의 취향을 정말 잘 안다." 는 강우석 감독의 포스를 원없이 느낄 수 있으리라. 영화는 대중의 민족주의, 윗대가리 잡것들에 대한 증오심 등을 적나라하게 스크린에 올려서 보여 준다. 뉴스를 편집해서 제작했다는 오프닝은 물론이요 가장 이상적인 한국적 가장의 이미지를 가진(!) 안성기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연기하면서 민족감정을 마구 자극하는 시원시원한 대사들을 쏟아낸다. 소위 배웠다는 인간들의 비열한 언행은 무능한 가부장에 대한 증오심을 쏟아낼 수 있을 만큼 생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개봉 전 많은 영화잡지 기자들이 지적한 바 있듯, 이렇게 영화를 끌고 나가면 영화가 구태의연하고 촌스러워 지기 십상이라는 위험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별다른 기교 없이 끌고나가는 이야기와 감정이 흘러넘치는 화면과 대사, <실미도>의 오프닝에서 보여 준 바 있는 일면 거칠기까지 한 교차 편집도 전혀 어색한 감이 없어 눈에 띄는 단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강우석이 지닌 감독으로서의 포스 또한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성 싶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두 시간 반동안 한국인이 소망하는 가부장에 대한 만점 답안을 직접 행복과 판타지를 제공하는 맛있는 진수성찬이다. 이 영화가 "대한제국 = 대한민국" 과 같은 터무니없는 가정을 근거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느니, 오버스러운 민족감정에 호소한다느니 하는 비판은 일단 이 글의 주제가 아닌 만큼 접어 두도록 하자.(아마도 관객들의 평이 극대 극으로 엇갈리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싶다. 참고로 난 강우석 감독의 정치 의식을 아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3.

적어도 상품의 측면에서 보면, <한반도>는 한국인들의 수준과 입맛에 맞는 꽤 잘된 수작이다.
2006/07/29 22:18 2006/07/29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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