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는 공주님과의 약속을 지켜
높고 단단한 탑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순간 공주님은
살 곳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공주님은 당황하고 슬퍼서 울었습니다.

지친 왕자는 말없이 서 있다 돌아섰습니다.

무너진 탑과
사라진 왕자와
가난하고 초라한 공주님만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아아,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겠구나'

공주님은 울음을 그치고 일어섰습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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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녀가 있다. 만지면 쨍 하고 금갈 것만 같아 손 대기도 겁나는 청순가련형 미소녀. 하지만 누구라도 부러워할 외모를 타고 난 탓에 그녀의 삶은 엉망 진창이다. 남자들은 그녀를 성적인 흥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누구보다도 고민을 나누고 이해를 해줘야 할 또래 여자들은 그녀를 멀리한다. 그 이유는 꽤나 다양하다: 그녀의 외모를 시기해서. 남자친구가 자길 버리고 그녀에게 빠졌기 때문에.

사태의 어딜 살펴봐도 그녀의 잘못은 하나 없지만 바로 그 탓에, 그녀는 항상 혼자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사람 사귀는 법을 못 배운 탓에 상황은 호전되는 법이 없다. 매정한 세상은 사소한 친절이 못내 고마워서 어찌 해야 할지 몰라하는 이 서툰 소녀를 가만두지 않는다.

2.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그림 동화>와 같은 옛 이야기의 효용에 대해서, 어린이에게 이타심을 버리고 보다 만족스러운 존재로 독립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부터 오빠에게 의존해 온 어느 소녀는 <헨젤과 그레텔>에 매료되어 읽고 또 읽었는데, 처음에는 헨젤이 동생을 인도하지만 나중에는 그레텔이 마녀를 퇴치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베텔하임에 의하면 <헨젤과 그레텔>은 그녀에게 "처음에 오빠에게 의존한 것이 나중에 성장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는 확신을 주었고, 이는 그녀가 오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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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을 따라나서는 라푼젤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심리적으로 겪는 난관은 다양한 만큼, 옛 이야기들이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난들 또한 다양하다. 마녀가 열두 살 소녀를 탑 속에 가둬버리는 이야기인 <라푼젤Rapunzel>은 사춘기 소녀의 자립이라는, 상당히 전형적인 문제를 다룬다. 탑은 라푼젤을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지만, 또한 독립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라푼젤은 왕자와 만나 곤경에서 탈출함으로써 사춘기의 전형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3.

<시니컬 오렌지>는 탑 속에 갇힌 라푼젤이 어떻게 세상 속으로 걸어나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이라는 말 자체에 "사람 사이" 라는 뜻이 있듯이,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타인과의 관계가 전무한 소녀는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예쁘장한 인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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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함께하면서 소녀는 사람과의 관계를 배워 나가게 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릴 줄을 전혀 모르는 그녀에게도 안식처는 있다. 이복오빠와 그 여자친구. 그들은 소녀를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는 탑과 같은 존재지만, 동시에 그녀를 가두고 있는 마녀이기도 하다. 라푼젤이 천년만년 탑 안에서 늙을 수는 없듯이, 그녀 또한 영원히 거기에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라푼젤이 탑 위로 올라온 왕자님을 만나면서 마녀의 손에서 벗어났듯이, 소녀 또한 한 소년을 만나면서 변해가게 된다. 그녀에게 왕자님의 손을 잡고 탑 밖으로 나서는 건 두렵고 걱정되는 일이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는 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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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가의 단편, <빨간 구두의 잔상>. 장편과 단편이라는 차이, 그림 동화와 안데르센 동화(<빨간 구두>)라는 모티프의 차이를 제외하면 두 작품은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일종의 프로토타입 버전이랄까.

시니컬 오렌지는 사건의 전개보다 섬세한 감정 묘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은 만화다. 사실 내가 이 만화를 보게 된 계기는 동네 만화방 아저씨의 추천 때문인데,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만화가 어떻게 인기가 있는지 좀 의아했다. 오늘 나온 완결편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니, 대부분 사춘기 여학생인 독자들은 이 라푼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용기와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되돌아 보니, 주인공을 성장시킨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년 만화는 육체적인 대결과 우정을 통해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순정 만화와 소년 만화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뭐 어떤가. 탑에서 나온 공주님은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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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Bruno Bettelheim, The Uses of Enchantment: The Meaning and Importance of Fairy Tales, Penguin Books Ltd, 1991
김옥순·주옥 역, <옛 이야기의 매력>, 시공사, 2000, pp.18 ~ pp.36.
2006/08/27 03:01 2006/08/2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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