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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위에 대한 다툼에서 발생했다.

사실: 가스코뉴 지방 등을 둘러싼 경제적 이익이 전쟁의 원인이었다.

중세기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기묘한 관계다. 간단히 말하자면, 본래 프랑스의 대귀족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기 대문에 잉글랜드 국왕은 브리튼 섬 안에서는 왕이요, 프랑스 땅 안에서는 대귀족이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보면 좀 이상하지만 당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의 땅은 노르망디 공작령에 그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에게는 딸 마틸다Empress Matilda밖에 없었는데, 왕위를 물려줄 사람이 여의치 않자 그는 앙주 백작 제프리 5세Geoffrey V, Count of Anjou를 데릴사위로 들이게 된다. 자연히 잉글랜드의 다음 국왕이 된 손자 헨리 2세는 외할아버지의 잉글랜드, 노르망디와 함께 아버지의 앙주 백작령도 차지하게 되었다.

헨리 2세는 아키텐의 여백작 엘레노아Eleanor of Aquitaine와 결혼했는데, 덕분에 그녀가 시집 오면서 가지고 온 투렌Touraine, 아키텐Aquitaine, 가스코뉴Gascony도 잉글랜드 왕의 것이 되었다.

헨리 2세 시대(1133~1189)의 대략의 세력도. 빨간색은 잉글랜드 국왕의 영토, 파란색은 프랑스 국왕의 직할지 일 드 프랑스(Ile-de-France)이다. 정확한 지도가 아니라 대충 영역만 표시한 개념도에 불과하지만 잉글랜드 국왕의 세력을 단적으로 이해하기엔 충분하다. 아키텐 공작령Duchy of Aquitaine은 가스코뉴Gascony와 생통쥬Saintonge 일대를 포함한다.

이렇게 되니 프랑스 땅 안에 프랑스 왕보다 잉글랜드 왕이 더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키텐 지방은 지금도 보르도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부가 가치가 낮은 농업에 비해 이 지역에서 나는 포도주의 관세 수입은 큰 돈이 되었다. 프랑스 국왕 입장에서는 입에 군침이 돌 법도 했다. 프랑스 국왕은 이런저런 핑계로 전쟁을 일으켜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를 조금씩 빼앗았다.

사실 프랑스 국왕이 군침을 흘리는 곳은 또 있었다.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방은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여 큰 돈을 벌고 있었는데, 자연히 여기서 얻는 세금 수입은 상당했다. 프랑스 국왕은 여기서 많은 세금을 걷는 대신 이곳을 다스리는 귀족 대상인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자연히 직접 세금을 내는 직공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오죽했으면 1301년에는 프랑스 국왕에 대한 반란까지 터졌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 지역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양모가 필요했고, 그 양모의 산지는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 왕은 양모 수출 대금의 일부를 관세로 받으면서 상당한 돈을 만지고 있었다. 직공들의 수입이 줄어들면 양모 대금을 지불할 수가 없다. 이것은 잉글랜드 국왕의 수입에 손해를 미친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국왕은 잉글랜드 국왕의 양대 밥그릇에 손을 댄 셈이었다.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잉글랜드 국왕의 영토를 슬금 슬금 집어먹은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이 만만하다고 여겼고, 잉글랜드 왕은 언제 한 번 대판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으니 전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결국 1337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군대를 소집하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 역시 여기에 맞섬으로써 양국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백년 전쟁의 배경에는 양국 왕가의 경제적인 이권이 있다. 보통 "잉글랜드 국왕이 자신이야말로 프랑스의 진짜 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 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에드워드 3세가 군대를 소집하면서 낸 성명서에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의 적인 스코틀랜드를 지원했으며, 또 잉글랜드 국왕의 가스코뉴에 대한 소유권을 침탈했기 때문에 군대를 소집하고 있다고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프랑스 왕위 이야기는 대체 왜 나온 것일까?

주인장이 졸라 고생하며 그린 족보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감상하시기 바랍니다.(이름 아래 숫자는 재위년도)

위 족보를 보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필리프 4세에게는 왕위를 물려주고 작은 아들 샤를에게는 발루아Valois와 앙주Anjou를 물려 준다.(이 때 앙주는 잉글랜드 국왕의 것이 아닌 프랑스 국왕의 것이었다.)

필리프 4세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 이사벨라는 1308년 잉글랜드 왕가와의 화해를 위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에게 시집을 보낸다. 그리고 큰아들 루이 10세에게 왕위를 물려 준다. 루이는 다시 왕위를 아들 장에게 물려 주었다.

문제는 루이 10세의 하나뿐인 아들, 장 1세가 왕위를 받자마자 승하했다는 것이다. 장 1세에게는 누나가 하나 있었을 뿐이기에, 왕관은 루이 10세의 동생 필리프 5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골때리게도 필리프 5세에게도 아들이 없이 딸만 둘이었다. 필리프가 승하하자 왕위는 막내 샤를 4세에게 돌아갔는데, 샤를도 딸 하나 뿐이었다.(-_-)

결국 1328년 샤를 4세가 승하하자 프랑스 왕관이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이냐가 문제가 되었다. 필리프 4세의 남자 후손이 끊겼으므로 왕위는 딸 이사벨라의 자식에게 가는 것이 옳다. 문제는 이사벨라의 아들이 바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였다는 것이고, 1324년 ~ 1327년에 걸쳐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가스코뉴의 영유권을 놓고 한 판 싸운 뒤였다는 점이다.

어떻게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는지...

이렇게 되니 어제까지 잉글랜드를 발라 버릴 궁리에 몰두하던 프랑스 왕궁의 귀족들이 기겁을 하고도 남을 법했다. 이 인간을 상전으로 받들었다가는 당장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결국 프랑스 귀족들은 발루아와 앙주의 영주, 필리프에게 프랑스의 왕위를 넘겨 버린다. 필리프 6세였다.

여러 모로 무리가 많은 즉위였지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아직 열 다섯 소년이었다. 잉글랜드 국내도 아직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도저히 게임이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에드워드는 필리프의 즉위를 인정하고, 영주로서 충성을 서약했다. 따라서 이 때 프랑스 왕위는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에드워드가 스스로를 프랑스의 진정한 왕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1340년의 일이다. 플랑드르 인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잉글랜드의 편에 서길 원했지만, 법적으로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난처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가 프랑스 왕임을 선언하면, 플랑드르 인들은 "자신들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진짜 프랑스 왕에게 충성한 것 뿐" 이라고 우기면 된다.

에드워드 3세의 초상화

사실 에드워드가 정말 프랑스의 왕권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에드워드에게는 프랑스 국왕을 완전히 쓰러뜨릴 실력도 없었을 뿐더러 이러한 "우기기" 가 가스코뉴를 뺏으려 드는 프랑스 국왕에게 맞서는 데 어느 정도 대의명분을 주었다는 점이다. 잉글랜드 군이 대륙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플랑드르를 통해 상륙하는 것이 편했기 때문에 플랑드르 인들의 편의를 봐줄 필요가 있다는 점도 있었다.

에드워드의 전쟁은 1356년 장남 흑태자Edward of Woodstock, The Black Prince가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에서 프랑스 군을 대패시키고 국왕 장 2세를 포로로 잡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1360년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휴전에 합의했다. 여기서 에드워드 3세는 확장된 아키텐과 칼레calais, 퐁티웨Ponthieu와 푸아투Poitou를 보장받는 대신 스스로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전쟁은 에드워드 3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잉글랜드 왕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의 적법한 왕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백년전쟁이 끝난 후에도 잉글랜드 국왕은 자신이 프랑스의 적법한 왕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1801년의 아미엥 조약까지 이어졌다. 1801년이면 이미 프랑스는 왕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 국왕 조지 1세의 문장(1801년 이전). 프랑스의 왕권을 상징하는 백합 문양이 보인다.

영국 국왕 조지 1세의 문장(1801년 이후). 백합 문양(Fleur-de-lis)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