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칼에 열광하는가

1.

“그런 취미 있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아가씨와 함께 밥을 먹다가 들은 얘기다. 확실히 내 취향은 흔치 않다. 남자들 중 밀리터리 취미를 가진 사람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칼이나 갑옷 같은 전근대의 병장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희귀하다. 그래서인지 왜 그런 걸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한다.

일본도의 코등이(츠바). 대나무 잎과 눈송이가 새겨져 있다. 살생의 도구에 걸맞지 않은 평화로운 이미지다. http://www.flickr.com/photos/churl/97863027/

egoing 님의 포스트를 읽다가 몇달 전 봉추찜닭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보면 확실히 밀리터리는 야동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이유는 있을 게다. 나는 왜 살상의 도구를 좋아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

2.

“이것은 생명의 거대한 드라마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것과 싸워야 되는 거에요. 그런 싸움은 선악이나 도덕을 초월한 것이지요. 생명을 가진 것들이 수 억만년의 시간 속에서 멸망하고 도태하고 다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아주 장엄한 문장으로 썼어요. 문장이 훌륭합니다.”

김훈이 네이버와의 인터뷰에서 을 추천하면서 남긴 말이다. 이 정도면 답이 되지 않을까?

http://www.flickr.com/photos/max_westby/430641017/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나는 생명을 살상하는 도구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본다. 병장기는 살생의 도구다. 빠르고 정확하게 상대를 살상하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이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이들은 세상 어떠한 물건보다 더 숨가쁜 진화와 적응을 거치게 되었다. 과장 좀 보태서, 전세계의 수많은 병장기 중에 똑같은 건 하나도 없다. 5분 뒤에 만들어진 것은 그 전에 만들어진 것보다 5분만큼 더 진화한다. 병장기란, 그런 물건이다.

가마쿠라 시대의 타치(太刀). 말 위에서 적을 내려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구니요시 작. http://www.flickr.com/photos/peterjr1961/3571828659/

덕분에 병장기는 인간의 창조물 중 가장 인간의 모습을 닮은 도구가 되었다: 끊임없는 진화의 결과물. 호모 사피엔스 종(種) 자체도 진화의 결과물이지만, 인간의 창조물들 또한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인간의 도구/사상/사회 구조 중 환경 적응의 결과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칼몸이 뿌리는 은빛을 볼 때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는 느낌을 받곤 한다.

3.

Gray Wolf. http://www.flickr.com/photos/dobak/119671566/

생명이 넘치는 것은 아름답다. 진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생명력 분출의 극한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선과 악 따위의 찌질한 가치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이는 또한 수컷 특유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동물의 수컷은 대개 암컷보다 더 아름다운데1, 나는 이것이 수컷 특유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컷은 조금이라도 시원찮으면 살아남아 유전자를 남길 수 없다. 수컷이 가진 아름다움이란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의 부산물이다: 거대한 뿔. 강인한 발톱. 날카로운 송곳니.

내가 병장기를 대하는 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무기는 끊임없는 진화의 결과물이고, 생명력의 발현이다. 그래서 나는 예리한 칼날에서 끓어오르는 인간의 에너지를 본다. 거대한 인간의 드라마를 본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병장기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쇠붙이 안에 가둬 놓은 작은 우주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 점을 좋아한다.

4.

http://www.flickr.com/photos/54013486@N00/2716491091/

이쯤 되고 보면 궁금해진다. 무기 진화의 궁극은 최첨단 무기들일 텐데, 정작 난 거기에 별 흥미가 없다. 그 이유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너무 발달한 탓에 잘 와닿지가 않아서2 그런 걸까. 아니면 내 클래식한 미감 때문인가.

한줄요약: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1. 딱 하나 예외가 있긴 하다. 인간. 

  2. 충분히 발달한 무기란 무기라기보다 마법일지도? 

40 thoughts on “나는 왜 칼에 열광하는가

  1. 현대 병기에는 ‘멋’이나 ‘미학’이 없죠. 극단적으로 살상을 위한 효율화된 형태의 무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옛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투쟁이나 죽음에 대한 미학관념이 있었기에, 병장기 나 무예, 전술 등에 대해서도 일종의 아름다움이 스며들은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과 살육이 삶의 일부에 자리잡은 고대인들에게는 그만큼 살상의 도구에 대해 삶의 일부로서 미학이나 철학 관념이 깊이 스며들었다고 보는게 가장 타장하겠죠. 사실, 지금 같은 현대인들에게는 많이 생소한 개념이겠지만요.

    • 현대 무기도 예술의 집약체이지 말입니다…

      결국은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그 관점을 ‘어디’서 끌어내느냐에 따라, “난 이게 좋아!”라고 취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거죠.

    • 레비아탄 // 동의합니다. 확실히 전근대 사회의 무기들에는 일종의 미적인 관념 혹은 죽음의 철학 같은 게 서려 있는 것 같아요. 지금과는 달리 죽음이 당연한 삶의 일부였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이었겠죠. 평균 수명도 짧았고, 전쟁이나 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았고, 죽은 이의 물건이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칼이나 갑옷에서는 그걸 사용하던 사람의 삶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런 묘한 모순도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isdead // 효율성도 확실히 아름다움의 일부지요. 다만 현대에는 무기도 대량 생산된 공산품에 불과하고, 지독할 정도로 효율성만 추구하니 특유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고전 병장기에 비해 좀 모자란 것 같습니다.

  2. 존중이니 취향해드리겠습니다.

    저는 희안하게도 범선들이나 갑옷류에 끌리던데 말이지요. 무기보다는 그런 방어구에 좀 더 끌리더군요. 그리고 구시대 화약무기에도 상당히… (어떻게 알았냐면, 예전에 MIT 견학 갔을 때 느낀 것과, 메트로폴리탄 가서 찍은 사진들을 분석해보니 그런 결론이 나왔습니다.)

    고어핀드님이 구시대적 무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신이 역사 오타쿠라 그럴 듯. 오래 된 무기에는 마력이 서려있지요.

    참고로, 저는 현대 무기도 좋아합니다. 단, 2차 대전까지만 헉후대고, 나머지는 그저 즐기는 수준.

  3. 기계공학과를 나왔는데 수업중에 교수님이
    수십억원짜리 CNC 기계의 가공 동영상을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가로세로 1미터쯤 되어 보이는 쇳덩이를 순식간에 비누조각하듯 조각해 내고
    드릴링과 탭핑을 1초에 수십번씩 하는 그 녀석을 보면서
    학생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지요.
    그때의 충격과 영상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한데
    그 극한기술의 결집과 기술자들의 피와 땀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의 총아를
    적어도 우리 공대생들은 너무나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떤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걸
    어떤 사람들은 보고 느끼기 때문에 차이가 생기는게 아닌가 싶어요

    • 예, 저도 아무래도 공대생이기 때문에 피와 땀에 대한 애정이 다른 사람보다 더 깊습니다. 거대한 컴퓨터의 연산을 볼 때도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만, 저는 고전 무기를 볼 때마다 그걸 쓴 사람만큼이나 수천 번 망치질로 그것을 만든 장인의 손길을 생각합니다. 그런 아름다움에 민감한 것도 뭔가를 직접 만들어본 사람들의 특징이겠지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모든 장인(엔지니어 포함)들에게 있어서 극한의 아름다움일 겁니다.

  4. 가장 속편한 방법은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개인취향은 존중”이겠죠.

    악의없이 순수하게 “왜 좋아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저게 통하지만
    ‘이 녀석 뭔가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왜?”라고 물어온다면
    영 골치가 아파지지만…

  5. 결국 ‘아니까 관심이 가고 관심이 가니까 취향이 되는’ 케이스가 아닐까 싶네요. =)

    • 그렇죠. 사실 저도 레고 성시리즈의 기사에서 시작했으니까요 :)

  6. 살의가 거세된 무기들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전 자연의 섭리를 잔인하다고 표현하고, 고어핀드님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느낌은 다르지만 인식은 같은 것이 참 오묘하내요. 좀 다른 관점에서 쓴 글 두개 저도 트랙백할께요. :)

    • 음, 오히려 개체 단위에서 만나볼 수 있는 도구들인 만큼 살의가 거세되어 있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미사일 같은 살상병기는 오히려 게임 속에서나 보는 것 같아서 잘 느낌이 오지 않거든요. 그리고 현대 병기 중에서도 탱크는 꽤 좋아합니다. 거대한 야수같은 느낌이 좋아요.(실제로 개도 커다란 종을 좋아합니다.) 전투기도 약간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트랙백해주신 글은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7. 취향이니… (마지못해) 존중 (?)

  8. 김훈 작가의 현의 노래에도 유사한 병장기에 대한 헌사가 있지요.
    칼 자체가 갖는 미학적 부분은 묘한 긴장감입니다. 관련글 하나 엮었습니다. ^^

    • 좋은 글 엮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현의 노래를 읽어보지 않았는데 서둘러서 읽어야겠군요. 현재 김훈 선생에 대한 글 하나가 정비소에서 수리중인데 정비가 완료되는 대로 다시 엮어 드리겠습니다. 그 글에서 무기의 악기에 대한 김훈 선생의 견해를 인용했는데 다시 봐도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9. 존중해주는 그녀를 만나게~.
    이왕이면 교감도 되는 그녀면 더 좋고.,

    동상, 체리닥터페퍼 사놀테니
    오게~.ㅋㅋㅋ

    • 앗~ 누님, 오랜만이에요 :)
      별고 없으시죠? ㅎㅎ :D

      저도 미국에 놀러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ㅜㅠ

  10. 왠지 읽다가 그렌라간에서 봤던 대사를 본것같은 느낌이 …

  11. 칼에 열광하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칼이 길잖아요…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긴 물건은 무조건 남성기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칼을 좋아하신다니 남자를 좋아하시겠군요. (!)

    물론 뻘플입니다.

    •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장군들의 지휘봉이나 서양 국왕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홀 등을 보면 긴 막대기 모양이 많거든요. 사실 탱크가 매력이 있는 이유 중 하나에는 거대한 포신 탓이 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뻘플에 이렇게 진지하게 댓글을 달아주신다니 굽신굽신

    • 아니, 뻘플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안 그래도 저도 그 쪽에 꽤나 주목하고 있었거든요.

  12. ㅎㅎ 저 역시 제가 왜 총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쓰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총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서 바로 그 질문을 받았거든요…-_-;;;
    네, 저 기소유예자입니다. 총포및도검 관련법…

    • 조만간 저도 도검소지허가를 취득하여 제 칼을 마련할 예정이니 저 또한 그 법과 인연이 있겠군요 :) 그런데 무슨 일로 기소유예까지 가셨나요? 설마 그 모델건에 그려야 한다는 빨간 줄을 안그렸다거나;;;

    • 네, 빨간 부품 없는 소장품을 팔겠다고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사진올렸죠…ㅎㅎ 부산경찰서에서 감시중이더군요. -_-;;;

    • 아놔… 정말 모델건도 도검처럼 면허 주고 맘대로 구입하게 풀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차라리 그게 나을 듯 해요;;

  13. 저는 칼덕은 아니고 총덕… (움찔)

    부산 영도경찰서였던가… 관할구역 무시하고 인터넷에서 건수 잡느라 혈안이었죠.

    •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자기네 실적 올리려고 그런 짓을 한다면서요? 그런 걸 보면 칼은 그나마 도검소지허가가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요, 허가까지 받은 사람을 터치하지는 않거든요.

    • 근데 칼의 경우에는 애매한 것이,
      날길이 6cm 이상 15cm 미만인 나이프들은
      소지허가대상이 아니라면서
      흉기로 쓰일 수 있다고 마구잡이로 압수하거든요.
      차라리 소지허가대상으로 지정해놓으면
      소지허가 받아서 맘 놓고 살 수나 있지… -_-;;

    • 음, 나이프는 그렇게 단속하는가 보네요. 일반 도검은 단속 안하거든요.

      확실히 한국에서 마이너한 취미 가지기는 정말 힘든 일 같습니다.

  14. 소생도 칼날의 그 예리함을 좋아라합니다.

    뭔가 그 곡선의 아름다운 자태와 스윽 만졌을때 손끝을 슥 먹어들어가는

    그 묘한 느낌, 그래서 칼붙이는 뭐가 되었든 좋아하는것같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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