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기 참 난감한 질문들

미묘한 어긋남에서 생겨나는 난감한 질문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1.

Violin

“체르니 몇 번 치는데?”

초등학교 시절 자주 받던 질문이다. 바이올린을 몇 년 했다고 하면 으레 이런 질문이 따라붙곤 했다. 체르니라는 것은 피아노 연습곡집 이름이다. 잘은 모르지만, 피아노 연습하는 사람들은 연습곡집 몇 번을 연습하느냐를 기준으로 수준을 가늠하는 풍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게 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바이올린은 피아노하고 커리큘럼 자체가 다르기1 때문이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체르니 연습곡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친다고(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그런 거 모른다고 했다간 몇 년 해 놓고서 그것도 못하냐는 식의 시선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피아노하고 바이올린은 커리큘럼 자체가 다르다고 설명하기는 귀찮다. 설명해봐야 잘 알아듣지도 못했다. 나는 중학생이 되고서야 비로소 이 난감한 질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남자 중학교에 악기 연습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2이다.

2.

“운동을 좋아하시나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운동을 한다. 이틀은 헬스장에서, 나머지는 검도장에서. 그러면 사람들은 대개 신체 활동을 좋아하는 건강한 스포츠맨을 연상한다. 정말 그럴까?

Fitness Center Icarian Strength Machine at Colonnade Boston Hotel

내가 운동을 하는 건 상당히 새로운 현상이다. 대학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제발 체육점수가 80점을 넘어가길 비는 수준이었다. 세월이 흘러 병약하던 꼬마는 건강한 청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공과 친하지도 않고, 겨울에 스키장도 안 간다.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한다. 병약하던 어린 시절이 내게 남긴 습속이리라.

어쨌건,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좋아한다고 하기엔 어색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이상하다. 이러쿵저러쿵 썰을 풀기는 귀찮고. 입법 과정은 무효지만 법안 가결은 유효라는 식으로 우길 수도 없고.

3.

“무슨 작가를 좋아하세요?”

제일 난감한 질문이다. 독서를 소설책이나 에세이집을 읽는 활동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김현진, 이런 이들의 작품 말이다.

대체,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애시당초 나는 문학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덕분에 글쓴이를 중심으로 책을 고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폴 크루그먼이나 진중권 정도인데,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기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작가가 없다고 하자면 “뭐 이래?” 하는 표정을 짓기 일쑤다. 그렇다고 제반 상황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기엔 너무 귀찮고…

New messenger bag contents

흔히 취미가 독서라는 사람들을 본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범주화해도 좋은 걸까. 독서 취향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고, 무엇보다 문학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지구와 안드로메다 사이만큼이나 큰 간극이 있다. 아마 문학 좋아하는 사람은 나같은 사람보다 영화 좋아하는 사람과 더 가까우리라.

4.

이따금 대화가 엇나가는 난감함을 겪을 때가 있다. 기본전제 자체가 서로 다른 문답을 할 때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럴 때면 내 머리에 usb를 꽂았다가 상대방 머리에 꽂아 주고픈 충동을 느끼곤 한다. 전제 자체를 복사해버리게.

  • 그러고보니 셋 다 여자들이 잘 묻는 질문이다. 그녀들은 금성에서 온 걸까. 난 화성에서 오고.

화성에서 온 고어군~ http://en.wikipedia.org/wiki/File:Marvinthemartain.jpg


  1. 그러고보니 바이올린은 “치는” 게 아니라 “켜는” 거다. 

  2. 나도 바이올린을 그만 뒀고. 

11 thoughts on “대답하기 참 난감한 질문들

  1. 1.
    위 질문들을 물어본 여성은 완전체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특히 1번과 3번 질문은 각각 80%와 60%의 확률을 보여주는군요.

    는 구라이고, 사람은 자신을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2.

    저도 그런 경우 가끔 있습니다.

    미쿡 산다고 말하면, “영어 해봐”
    기타 칠 줄 안다고 하면 “쳐봐.”

    특히 영어 해보라는 건 대응하기 참 난감합니다. 애초에 대화에 친근한 성격도 아니고, 친 수다 능력도 없거든요.

    • 그렇죠. 검도 한다고 하면 누구나 쉽게쉽게 몇 단씩 따는 줄 알아요. 기타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2. 남자들도 잘 묻는 문항이네요. 그나저나 바이올린이라니! 오오~

  3. 넵 그런거임.

    ‘당신의 상식이 세상의 상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라는 말이 있죠 ㅋ_ㅋ

  4. 주로 전공과 관련해서….

    지인:야, 너 법학과지.
    저:응.
    지인:(갖고 있던 법전을 뺏으며)법전 한번 외워봐.

    은근히 이런 사람들 많습니다. 무슨 법학과는 헌법 민법 형법 조문을 외우고, 사법시험은 받아쓰기 시험인줄 아는 사람이 꽤 있더군요; 법학을 하고 사랑하는 법학도의 입장으로서 이거 만큼 기분 나쁜 대우도 없습니다.

    • 법이라는 게 외울 것 읽을 것이 정말 많기는 하지만, 단순히 법 조항을 외우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무슨 의지, 무슨 책임, 무슨무슨 학설 이런 게 정말 많더군요.

  5. “무슨 작가를 좋아하세요?”
    이 거 나도 많이 들어봤다 ㅋㅋㅋ 전에 들었을 때 “요즘엔 앨빈 토플러가 좋더라구요.” 라고 하니 뭥미?란 표정으로 쳐다보더라. ㅋ 앨빈 토플러가 누군지는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아니까.

    • 알긴 아는데 “작가” 라고 생각하지는 않지. 나도 필립 코틀러 교수 책을 좋아하는데 이 분 또한 작가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으니까. 소설가 등을 기대했던 상대 입장에서는 조금 황당했겠지. ㅋㅋㅋ

  6. 이런경우 저는 되묻기크리 + 공감주문을 사용합니다.

    잘만 먹혀든다면 어느새 그녀는 “어머 XX씨랑은 참 잘맞는것 같아요” 를 외치고 있다는..!!

    머리싸매며 뭐라고 하지 고민하며 대답해줄 필요가 전혀 없어요!!
    질문은 내가하고 선택도 내가하는겁니다!!
    -한 솔로부대원의 변명-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