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모두가 긴장이 풀어지는 연말이라면,

초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는 건 일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파충류가 되어버린다던가.

1.

바쁜 연말,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이었다. 붐비는 인파 조금 앞에 웬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겉모습은 사람이 맞는데, 어째 파충류로 둔갑이라도 할 기세다. 얌전하고 심약해 보이는 아가씨가 그러고 있는 걸 보자니 갑절로 그로테스크했다.

조금만 더 보고 있다간 진짜 도마뱀이라도 되어 버릴 것 같은 분위기. 더는 볼 수가 없어, 인파를 헤치고 다가갔다. 옆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누나, 오랜만이야. 요즘 어떻게 지내?”

2.

미국의 뇌과학자 폴 맥린Paul MacLean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의 뇌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고차적 사고를 담당하는 ‘인간의 뇌’. 그 아래, 감정과 본능을 관장하는 ‘포유류의 뇌’. 그리고 그 맨 밑에서 생존과 번식을 담당하는, ‘파충류의 뇌’. 이른바 삼위일체뇌 이론Triune Brain이다.

Rough Green Snake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항상 합리적인 사고만을 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다. 뭔가 결정이 필요할 때 파충류의 뇌가 본능에 따라 저질러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인간의 뇌는 사후약방문 식으로 합리화만 하게 된다. 이 설의 매력은 인간의 비합리적인 실수들을 설명해 준다는 점 이상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파충류를 징그러워한다. 하지만 이 설에 의하면, 그 징그러운 생물체가 오히려 우리의 벌거벗은 얼굴에 가까울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이 가설에 눈길을 주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싶다.

3.

“아, 내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를 갈면서 그 날을 기억한다.”

언젠가 잡지 한 구석에서 본 글 한토막이다. 글쓴이가 글을 쓰는 와중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아저씨, 소풍 가는 여자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쓰다듬어주고 싶었나봐요? 봄 햇살이 그렇게 따뜻했나보죠?” 신랄하게 비꼬는 글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글자 하나하나에서 절절한 분노가 묻어나오는 글을 본 기억이 없다. 인간의 분노 이상의 좀 더 깊은, 파충류 수준의 분노. 그게 아니라면 세월의 때조차 끼지 않는 그 분노를 설명할 방법은 아마도 이 세상에 없을 터다.

Bearded dragon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남성은 본능적으로 거세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고 한1다. 수컷 파충류의 뇌 속에 이런 물건이 들어가 있다면, 암컷 파충류의 뇌 속에 만만치 않은 뭔가가 들어가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겠다. 뭔가 낯선, 거대하고 힘센 생물체가 내 몸을 마음껏 희롱하고 다 쓴 걸레처럼 버릴 수 있다는, 그런 것 말이다. 실제로 그런 게 있다면, 그리고 그런 상황을 만난다면, 사마귀 앞의 메뚜기가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바싹 굳어 버리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상대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들지 않는 그 무엇일 테고.

Really? 증명할 수는 없지만, 최근 나는 이것이 나름 타당성 있는 가설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한 인터넷 게시물을 읽다가였다. 그에 따르면, 어떤 남자가 앞자리에 선 젊은 여성의 몸을 더듬었고, 겁에 질린 피해자는 울먹거리며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었다. 분노에 가득 찬 댓글들 사이에서, 나는 오히려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소리도 안 지르고 얌전하게 자리만 피하다니?” 인간의 뇌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잠시 뒤, 나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녀의 작은 머리가 작동을 멈춰 버린 게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그 상황에서 그녀를 조종한 것은 인간의 뇌가 아니라, 얼결에 제어권을 넘겨 받은 파충류의 뇌였을 터다. 인간의 말로는 표현 못 할, 그런 원초적인 공포감 앞에서 그 뇌는 저항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고.

4.

“많이 무서웠지요? 괜찮아요?”

나한테 이끌려 지하철에서 내린 뒤에도, 그 아가씨는 약간 얼이 빠져 있는 듯했다. 변신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 그녀가 파충류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게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푹 쉬시고, 싹 잊어 버리세요. 그럼 전 이만.” 선약이 있는 데다가 다정다감한 말재주도 없어서, 이 말만 건네고 먼저 자리를 떴다. “누나라고 하지 말고 친구 동생이라고 할 걸 그랬나.” 온갖 모임 회식으로 시끌벅적한 연말, 모두가 바쁘다. 친구들 만나러 가는 젊은 아가씨도. 몸 만드는 데 열중하는 20대 청년도. 뻔뻔 무비한 지하철 치한도.


  1. 정작 프로이트는 현대 심리학에서는 거의 부정되다시피 한다지만. 

12 thoughts on “변신

  1. 과감한 용기와 탁월한 심리분석과 말재주없음까지… ㅎㅎ.

    • 과감한 용기라… 그런 건 없었습니다. 사실 처음 피해자에게 말을 거는 순간까지, 저는 진짜 성추행 상황이 맞나 긴가민가 했었거든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처음 그 아가씨에게 말을 걸 때도 “상황 아니면 그냥 사람 잘못 본 거라고 얼머무리고 넘어가야지.” 하고 있었죠. 그 다음 순간 성추행 상황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만…

      저도 두 번 다시 이런 상황 겪고 싶지 않아요.

  2. 뱀의 뇌에게 말을 걸지 말라? 사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 책.
    같은 맥락에서 나온 책?…

  3. 파충류가 된다? 무슨소린가요?-,.-; 허물벗기 얘기신가….

  4. 의로운 그대는 natural born 勇者. -_-/

    • 감사합니다. 의검님도 잘 지내시죠? 풍요로운 새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__)

  5. 텍스트큐브에서 작성된 비밀 댓글입니다.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일하고 연구하고 하다 보니 너무 바쁩니다 Orz 언제 날 잡아서 한 번씩 인사드리러 갈 수는 있겠습니다만,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항상 챙겨주셔서 감사한 마음 뿐인데, 제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_^;;

  6. 텍스트큐브에서 작성된 비밀 댓글입니다.

    •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도 또다시 저런 상황을 마주쳤을 때 저대로 행동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저 때도 너무 얼떨떨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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