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의 탄생 (1) – 성스러운 전쟁, 성스러운 전사들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이므로 전쟁을 할 수 없다.”

4세기의 기독교 성인 성 마르탱이 남긴 말이다. “칼 찬 자에겐 설법도 하지 말라.” 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는 전쟁을 죄악으로 규정했다. 성 마르탱 역시 본래는 군인이었지만,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면서 군대를 떠났다. 위의 말은 그가 군문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 중에 신앙적 병역 거부자들이 종종 보이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전쟁 정당화의 역사

하지만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고 나아가 국교가 되자, 이러한 믿음은 변화의 필요성을 요구받게 된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대규모 폭력을 보유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만족들의 침략에 시달리는 로마 제국의 존속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수적이었다. 로마 제국은 오래지 않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게 되었는데,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직접 다스렸던 만큼 전쟁의 신학적 정당화도 빨랐다. 그들은 신앙의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정당화했고, 성 게오르기우스와 같은 전사 성인(Warrior Saint)들도 받아들였다.

성 게오르기우스(St.George)를 새긴 조각. 초기 기독교의 성인 게오르기우스는 시레나 왕국을 괴롭히던 용을 잡음으로써 나라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그에 대한 전설은 5세기 경부터 나타나며, 중세 내내 추앙되었기 때문에 무기나 갑옷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이 조각은 14세기 말~15세기 초의 갑옷을 묘사하고 있다. 기사, 군인, 검객의 수호 성인이며 잉글랜드의 수호 성인이기도 하다. 성 안드레아 교회(St.Andrews Church), Clewer, England. http://www.flickr.com/photos/janerc/10490494/

반면, 서로마 – 훗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우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초기 가톨릭 교회는 전쟁은 사악한 것이며, 무기를 들거나 전쟁을 직업으로 삼는 것 역시 죄악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신념을 고수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전쟁은 죄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성 그레고리우스, 재위 590~604)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톨릭 교회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생각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단자들과 이교도들을 힘으로 개종시키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8세기 후반, 작센 전쟁(772~804)은 이 이념이 현실화되는 계기였다. 이 전쟁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the Great)가 이교도 작센족(Saxony)을 정복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을 계기로 전쟁은 정치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전사, 성스러운 전쟁

어떻게 이런 급반전이 가능했을까? 여기에는 약간의 배경이 있다. 샤를마뉴 대제의 아버지 소(小) 피핀은 본래 왕족이 아니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재상이었는데, 실력을 갖춘 대귀족인 그가 허수아비 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권위를 부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반면 종교적 권위를 부여해 줄 수 있는 교황은 로마 근처를 지배하고 있는 랑고바르드(Langobard) 왕국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양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교황은 피핀의 왕위 계승을 합법으로 인정해주는 대가로 랑고바르드 토벌과 이탈리아 중부 영토의 양도를 요구했다 – 피핀이 여기에 응한 것은 물론이다.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 대제에 이르면, 거래의 규모가 한층 더 커졌다.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왕을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는 대신,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고 전파할 임무를 부여했다. 가톨릭 교회가 이교도와의 전쟁을 정당화한 것에는 이러한 뒷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를 묘사한 동전. 서로마 제국 황제의 복장을 하고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File:Charlemagne_denier_Mayence_812_814.jpg

어쨌거나, 이 때를 시작으로 “성스러운 전쟁” 혹은 “주를 위해 싸우는 성스러운 전사” 개념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성직자가 전투 전에 군사들에세 설교를 하거나,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성자들의 유물을 전장에 들고 나오는 일도 늘어났다. 교황도 성스러운 전쟁을 축복하고 지원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은 노르만 족의 이탈리아 남부1 침공을 “이슬람 치하의 기독교도들을 해방시킨다.” 는 명분에서 지지했고, 1063년 이슬람령 스페인 원정에는 직접 군기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정리하자면, 교황 우르반 2세가 예루살렘에 대한 십자군을 소집했을 때, 이미 “신앙을 위해 싸우는 성전사”의 개념은 서유럽에서 상당히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기사단 조직은 이러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계속)


  1. 당시 여기는 이슬람의 영토였다. 

8 thoughts on “기사단의 탄생 (1) – 성스러운 전쟁, 성스러운 전사들

  1. 제목을 기사단이라기보단 성당기사단이라고 하시는 게 더 맞지 않을까요? 문맥을 봐서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입은 기사단에 대해서 쓰시는 것 같은데 그냥 기사단이라고 하면 이건 왕국들의 기사단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듯 해서요.

    • 그건 나중에 다룰 예정인데요… 왕국들의 기사단 자체가 성당기사단(템플러) 등을 비롯한 종교기사단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 아, 그런 거였습니까? 전 중세시대가 농노 – 기사 – 귀족 – 왕 구조라서 기사계급 자체가 상당히 일찍 발전해 있는 줄 알았거든요. 시작이 교회 먼저였을 줄은…

    • 기사 계급 자체가 귀족이니 일단 둘은 중복되어 있군요. 기본적으로 기사 계급은 교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발전해 갑니다만, 기사단 제도는 중앙 집권화의 산물로서 봉건적인 기사 제도와는 조금 다릅니다. :)

    • 아 저기서 제가 말한 “기사”는 작위 없이 자기 지역만을 다스리는 기사를 말한 건데 그런 거라면 기사보다는 “영주”라고 쓰는 게 더 맞겠군요. 그리고 기사단의 기사는 전투만을 담당하는 존재다 보니까 영주와는 확실히 다르겠습니다.(가만, 그런데 영토의 크기가 크면 영주 직할의 기사도 있지 않았나 싶은데요. 기사단급까진 아니더라도 직할 기사 한둘 정도는 있었을텐데)

    • 1. 약간 헷갈리시는 것 같은데… 간략히 정리를 해 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기사라는 의미는 넓은 의미에서 왕과 대영주, 소영주 등을 모두 포괄합니다. 다만 좁은 의미에서는 따로 봉토를 가지지 않은 전사계급의 최하층을 가리킵니다. 다스리는 봉토가 있다는 얘기는 곧 작위가 있다는 의미이므로, 이 기사들은 작위도 없습니다.

      따라서 큰 의미로 쓸 경우, 농노 – 기사 – 왕 혹은 농노 – 기사라고 써야 맞습니다. 작은 의미로 쓸 경우, 농노 – 기사 – 영주 – 왕이라고 쓸 수 있겠죠. 후자의 경우 귀족이라는 말은 기사, 영주, 왕을 포괄하는 의미가 됩니다.

      2. 영주 직할의 기사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은 정확합니다. 봉토를 보유하지 않고 영주나 다른 기사 아래서 복무하는 월급쟁이 기사들이 많았지요. 하지만 이 때는 기사단이라는 체계는 잡혀 있지 않습니다. 기사단이라 함은 로마제국 붕괴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는 군사 조직체를 가리키는 말로, 자체적인 군령 체계와 군법 등을 보유하기 때문입니다.

      월급쟁이 기사들에게는 이런 것이 그리 뚜렷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사단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2. 하앍하앍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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