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팬심

1.

“와, 목소리 정말 예쁘다! 누구지?”

2008년 초였다. 을 보는데, 차분한 멜로디 하나가 내 귀에 꽂혔다. 가사 한 토막을 재빨리 머릿속으로 옮긴 뒤 검색창에 붙여넣었다. 제목: ‘만약에’ 가수: ‘태연’. 처음 듣는 가수였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검색창이 보여 준 뉴스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얘가 소녀시대 리더라는 그 아가씨구나…” 나는 그날 처음으로, 태연이라는 가수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부른 다른 노래가 없는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던 거다.

지금 와서 보면 의외지만, 소녀시대가 데뷔했을 때,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원더걸스와 라이벌 관계라고 해도 그냥 그런가 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그래, 태연이라는 당달막한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던 거다. 그것도 아주 많이. 목소리도 예쁜데 얼굴도 정말 귀여우니까, 싫을 리가 없었다. Gee가 나왔을 때쯤엔, 난 이미 포탈에 올라온 소녀시대 기사는 일단 클릭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한 명의 팬만 되도 결국엔 소덕이 된다.” 팬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이건 딱 내 얘기였다.

2.

The One + 태연 “별처럼” 보컬 스승인 더원과 제자인 태연이 거의 10년 만에 함께 듀엣한 노래다. 공개되자마자 모든 음악사이트를 올킬한 걸 보면 필자같은 팬들이 은근히 많은 듯(…)

클래식을 제외하면, 여자 가수들의 발라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1]다. 소녀시대 노래를 들을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댄스곡도 좋아하긴 하지만, 역시 내가 좋아하는 곡은 발라드1다. 내가 태연 팬에서 소녀시대 팬으로 확장 개업한 것도 뒤늦게 들은 1집에서 “그대를 부르면” 이라는 발라드를 듣고 난 뒤였다. 그 후로도 쭉 마찬가지였다: 새로 앨범이 나오면, 일단 발라드부터 찾는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OST에 누가 참여라도 했다 하면 잽싸게 사서 듣는다. 반면 타이틀곡은 그저 그렇다. ‘Oh!’가 나왔을 때도 노래는 많이 들었지만2 무대는 거의 보지 않았고, ‘훗’ 에서는 아예 컴백 무대만 한 번 보고 끝이었다. 타이틀곡보다 발라드를 더 좋아하는 팬. 이것이 내 정체다.

흔히 소녀시대 미니앨범 2집 하면, 독특한 안무로 화제가 됐던 타이틀곡 ‘소원을 말해봐’를 떠올린다. 하지만 취향이 취향이다 보니, 내가 떠올리는 건 좀 다르다. 제시카와 온유가 함께 부른 ‘1년 후…’ 라는 곡이다. 사소한 오해로 헤어진 연인이 1년만에 마주친 이야기를 담은 노래인데, 바로 이 노래 때문에 나는 저 앨범을 가지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성실 무쌍하게 소덕질을 하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중에(…) 자동으로(…) 앨범을 샀다고 오해하지만, 난 엄연히 노래가 마음에 들어서 산 거다3. 실제로 가장 최근에 나온 미니앨범 3집은 안 샀다. 마음에 드는 노래가 없어서. 정말이다. 제발 믿어줘

훗 뮤직비디오. 뮤직비디오가 참 예쁘긴 했다.

3.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녀시대를 향한 내 팬심은 말로는 표현 못할 뭔가 복잡 미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뭐랄까, 얘들은 좋은데, 정작 얘들의 주 활동은 별로 마음에 안 든다, 이런 거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멤버들이 돌아가며 다른 가수의 노래들을 부른 음반도 나왔으면 좋겠고, 남자 가수들과 듀엣도 더 자주했으면 좋겠고, 드라마 OST에도 더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디지털 음원같은 거 없이 그냥 CD만 발매해도 좋겠다. 가격이 좀 비싸도 상관 없다. 가격이 뭐 대수냐 나는 팬인데.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하지만 기획사 입장에서 보면? 내가 좋아하는 발라드 음원 같은 건 별로 돈이 안 된다. 많이 받아 봐야 한 곡에 500원 받으면 다행이고, 그나마 그 값도 제대로 쳐서 받는 경우가 별로 없다. 돈이 되는 건, 행사나 CF다. 거기도 회사이니만큼 수익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다. 그녀들이 이따금 드라마 OST 같은 데 참여해서 발라드를 부르는 건, 그저 나같은 팬들을 노리고 인기관리를 하기 위한 것일 뿐일 게다. 일단 인기가 유지되야 행사도 뛸 거고, CF도 찍을 테니까.

나 같은 사람이야 태연이나 티파니가 디지털 싱글을 발매했다고 하면 바로 달려들지만, 대개는 그렇지가 않다. 대중들이 원하는 건 그녀들이 짧은 숏팬츠 입고 춤추는 모습이다. 자연히 내 취향 같은 건 설 자리가 없다. 나도 전후 사정을 알기 때문에, 소속사 탓을 할 생각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Youtube를 뒤지면서 그녀들이 라디오 같은 데서 부른 곡들을 찾아보면서 위안을 삼는 것 뿐이다.

4.

머리를 깎으러 갔다가 미용실에 비치되어 있는 몇달 전 잡지를 펼쳐들었다. 소녀시대 mini앨범 3집 평이 눈에 들어왔다. 별 다섯 개 만점에 두 개. “예상했던 대로, 소녀시대가 내놓는 결과물은 Gee 이래 꾸준히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이런 차가운 평을 접하는 건 팬으로서 속상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탱구야~ 너는 뭘 먹고 이렇게 귀엽니? ㅠㅜ

소녀시대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아이돌이다. 아이돌은 상품이다. 상품이라면, 대다수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꾸며지는 게 정상이다. 음악적 퀄리티가 가수의 기본이라지만, 이것도 챙기기 힘든 상황인 셈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이따금 내 좋아하는 스타일의 노래를 한두 곡씩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래, 나같은 일개 청자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처음부터.

  • 덤: 티파니 이 노래도 정말 좋음. 추천.

[^1]: 단적인 예로, 서영은의 ‘내안의 그대’가 내 애창곡이다.


  1. 참고로 고어핀드의 소녀시대 곡 재생 top 7. 2개 빼고 다 발라드다: 1. 1년 後… 2. kissing you 3. 들리나요… 4. 사랑인걸요 5. 나 혼자서 6. 영원히 너와 꿈꾸고 싶다 7. 소원을 말해봐 

  2. 컨셉이 컨셉이라 그런지,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 들으면 정말 딱이다(…). 

  3.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소덕이 여기 있다고 해도 상관 없다(…). 

6 thoughts on “기묘한 팬심

  1. 문근영은 어딘가로 사라졌근영

    • 근영이는 여전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이지영. 안사라졌지영. >_<

  2. 개인적은 걸그룹 略史

    노래란 신승훈 정도 되는 분이 불러야 함(암흑시대)

    원더걸스의 ‘텔미’가 전국을 휩쓸 때, “오오~ 소희 짱~”…으로 걸그룹에 대해 관심이 듬.

    원더걸스의 라이벌이라는 소녀시대의 이름을 알기 시작(개개인의 얼굴과 이름은 매치가 안 됨)

    무한도전 올림픽 대로 가요제에서 ‘제시카’란 이름을 알게 됨.

    오호~ 제시카란 아이가 귀엽구나.

    그러다 같은 멤버의 순규를 알게 됨.

    순규로 천하통일.

    …이런 저에게 소녀시대의 탱구를 언급하시면서 순규의 이름이 전혀 없는 이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사옵니다.

    • 오호~ 제시카란 아이가 귀엽구나. (2)
      오호~ 제시카란 아이가 귀엽구나. (2)
      오호~ 제시카란 아이가 귀엽구나. (2)
      오호~ 제시카란 아이가 귀엽구나. (2)
      오호~ 제시카란 아이가 귀엽구나. (2)

      … 제 눈에는 저 한마디만 들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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