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 잡던 그 사나이 (1)

1.

히코네 성에 전시된 히코네 류 갑옷. http://www.flickr.com/photos/bit-101/433149579/

일본 전국 시대 갑옷 중에 히코네[彦根]류(流) 갑옷이라는 게 있다. 재미있는 건 이 갑옷들의 특징인데, 한마디로 특징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다른 유파의 갑옷들은, 투구가 이러저러하다던가 갑옷 구조가 어떻다던가 하는 식으로 딱 부러지는 특징이 하나씩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갑옷들을 볼 때도 이런저런 걸로 봐서 이건 어느 류 갑옷이구나 하는 식으로 읽어 낸다.

히코네 류 갑옷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건 바로 빨간 색이라는 것 뿐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빨간 색이다. 전국 시대 후기 이후 갑옷들이 대개 검은 색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개성이긴 하다. 하지만 빨간색으로 칠하기만 하면 그만인 걸 가지고 거창하게 이름까지 붙이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임에 틀림없다.

2.

지금은 사라졌지만, 빨간색은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애용되는 색깔이었다. 인상이 강렬하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복장을 통일한 부대가 적에게 덤벼들면 싸우기도 전부터 강력한 심리적 압박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백 명이 넘는 부대원 전체의 갑옷을 도색하는 것은 비용 부담이 가는 일이다. 자연히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요즘으로 치면 특전사나 해병대 같은, 정예 부대에서나 허락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히코네류 갑옷은, 에도 바쿠후(江戶幕府)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부하 장수,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부대가 착용하던 것이다. 나오마사의 영지가 히코네였기 때문에 히코네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도쿠가와 4대 천왕’이라 해서, 일본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네 명의 장수가 있었다. 이이 나오마사는 그 중 한 명이었다.

도쿠가와 4대 천왕: 사카이 타다쓰구[酒井忠次](왼쪽 위), 혼다 타다카쓰[本多忠勝](오른쪽 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왼쪽 아래), 그리고 빨간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오른쪽 아래). 모두 의 이미지.

그럼 어쩌다가 나오마사 부대의 복장이 빨간색이 됐을까? 여기에도 약간의 사정이 있다. 원래 나오마사 부대라고 해서 빨간 갑옷을 착용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 복장은 도쿠가와의 이웃 세력이던 다케다[武田] 집안의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군신’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하 장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의 부대가 이 빨간 갑옷을 착용했다.

야마가타 마사카게. 역시 빨간 갑옷을 입고 있다. 게임에서도 아예 전투기술 이름이 “적비”로 나온다. 의 이미지.

다케다 신겐이 죽고 도쿠가와가 다케다를 멸망시키게 되자, 다케다 소속 장병들의 전후 처리가 문제가 됐다. 비록 망하긴 했지만, 용맹 무쌍한 다케다 군사들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전란이 계속되는 시기였으니, 무장이라면 누구나 싸움 잘 하는 병사들을 거느리길 원했다. 결국 이 병사들을 차지한 것이 나오마사였다. 4대 천왕 중 한명인 사카이 타다쓰구가 이에야스에게 진언하여, 이들을 나오마사에게 배속해 주는 게 좋겠다고 했던 것이다.

말이 4대 천왕이지, 사카이는 이에야스의 친척인 데다가 처는 이에야스의 숙모였다. 4대 천왕 중에서도 제일, 아니 이에야스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이런 사람이 이에야스에게 부탁하면 사실상 결정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이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사카이에게 달려와서 절반 정도는 자신이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사카이는 한 마디로 잘라 버렸다: “본래 걔들은 주군께서 나한테 준다고 하신 애들이거든? 그걸 내가 나오마사한테 넘긴 것인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야스마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옛 다케다의 병사들은 나오마사의 부하가 됐고, 나오마사는 그들의 옛날 갑옷 디자인을 참고해서 빨간색으로 복장을 통일한 것[^1]이었다. 이이의 붉은 군단[井伊の赤備え] – 사람들은 나오마사의 부대를 그렇게 불렀다.

지금도 히코네 지역 축제에서 볼 수 있다. http://www.flickr.com/photos/84141326@N00/59397942/

3.

사카이는 왜 그랬던 것일까? 용맹 무쌍한 다케다 군단병들, 자기가 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은 않았을까? 내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니, 사카이의 머릿속을 안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짚이는 것은 있다. 다른 사람이 이들을 차지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지만, 나오마사가 차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전부 나오마사에게 주었다 – 이것이 내 생각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이미지.

도쿠가와 집안은 원래 미카와[三河] 지역의 작은 성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이에야스의 대에 이르러 미카와 전체의 주인이 되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몇 대에 걸쳐 도쿠가와 집안을 섬긴 사람도 흔1하다. 이게 문제다. 그저 시골의 토착 군사 집단이라면, 이건 별로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도쿠가와는 이제 여러 소국들을 아우르는 대세력으로 성장했다. 신참들이 들어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가신들이 다케다 군단병들을 차지했다고 생각해 보자. 훌륭한 병사들을 얻은 가신들이야 좋겠지만, 바깥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뻔하다: “싸움 잘 하는 애들은 전부 지들이 데려가는군.” 무공을 세우는 것이 출세의 길이던 시절, 싸움 잘하는 부하들은 최고의 밑천이다. 이걸 고참들이 다 차지하는 걸 본 신참들이 고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또다른 문제도 있다. 도쿠가와와 다케다는 십 년이 넘게 서로 싸워댔다. 이 얘기는, 도쿠가와 군단 장병들 중에 다케다 군단 손에 부모 자식 형제 전우를 잃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는 얘기2다. 이 마당에 얘들을 기존 부대에 편성했다고 생각해 보자. 기존의 장병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칼부림이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무엇보다 전쟁에 져서 소속을 바꾼 다케다 군단 출신들이다. 대대로 도쿠가와에서 근무한 병사들이 언제고 차별할 수 있다. 여기서 작은 다툼이라도 생겼다고 치자. 그러면 새로 들어온 신참들, 특히 항복한 다케다 출신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전쟁터에 나갔을 때, 불만을 품은 이들이 딴 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계속)

[^1]: 다케다가 멸망한 지 2년 후라고 한다.


  1. 대표적인 것이 역시 4천왕의 일원인 혼다 다다카쓰. 소설 에서는 아예 다다카쓰의 아버지가 이에야스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투구를 바꿔 쓰고 대신 적진에 뛰어드는 장면도 나온다. 

  2. 반대도 마찬가지. 

19 thoughts on “새우 잡던 그 사나이 (1)

  1. EE 나오마사 아 C풋 더러운 트럴새끼들(….)

  2. 피튀기게 싸운 군사를 배속하기 힘들지 않겠냐는 문제는.
    아자이가 군사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배속된 것이나 마찬가지란 면에서 춈.;

    • 아니지. 다음 글에서도 밝혔지만… 히데요시나 나가마사나, “신참” 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

  3. 아카조나에가 도쿠카와 군에 계승 되었었군요 +_+
    처음 알았습니다 굽신굽신

    • 뭐 사나다 군단도 아카조나에를 장비했으니까 이걸 쓴 데가 몇 곳 있기는 했죠;

  4. 잘 읽었습니다.

    여전히 저한테는 수수께끼입니다. 이에야스가 이이 나오마사의 어떤 면을 보고(뭐 호우죠우 씨[北条氏]와의 강화교섭을 성공시킨 공이 크다곤 하지만 말입죠) 직속 사단[旗本先手組]을 새로 창설하여 저렇게 몰아 주었는지… 더구나 가장 많은 인원수를 부여하면서까지 말입죠.

    직속 사단의 나머지 두 사단 –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두 사단은 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의 무사들을 편성한 것이기에, 그들과는 이질적인 새롭게 받아들인 타케다 구신 74기騎, 칸토우 소호족[関東の処士] 45기騎 등을, 새술은 새부대에 담는다고 아예 그들끼리만 따로 새롭게 편성하였다고는 생각합니다. 근데 왜 그게 하필 나오마사냐…하는 것이 저는 항상 궁금하더군요.

    그런 면에서 어떤 실마리나마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이에야스가 타케다의 옛 영토를 점령하는 것을 다룬 책도 구입했건만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군요.

    • 블로그에 자주 들르지 않아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글을 읽으셨겠지만, 저는 나오마사에게 다케다 군단병들을 몰아 주는 것이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군이 대놓고 그러면 뒷말이 나올 여지가 있으니, 맏형이었던 사카이가 나서서 못을 박아버린 게 아닐까요. 그러면 아무도 궁시렁대지 못할 테니까요.

      덧붙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당시 도쿠가와 군단 부대들의 인적 구성. 아마도 나오마사의 부대는 타다카쓰나 야스바라의 부대와 인적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그랬다면, 다케다 군단병들을 몰아 줄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죠.

      두 번째는 도쿠가와 군의 고후 점령 정책. 개인적으로는 도쿠가와가 오다보다 더 확실하게 해당 지역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고 보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어떻게 해 나갔는지를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오마사에게 다케다 구신들을 몰아 준 것도 이 일환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거든요. (같은 솜씨가 나중에 에도 지역으로 쫓겨갔을 때 발휘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 오사카 성의 사나이들>은 재미있게 읽으셨는지요. :)

  5. 붉은 갑옷을 입으면 3배 빨라진다고 생각했을지도…

    • 아니, 그 효과를 노리려면 다른 부대 갑옷은 모두 초록색으로 칠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

    • 위의 하코네류 갑옷을 보자마자 붉은 혜성을 떠올린 건 저뿐인가요..어쩌면 여기에서 모티브를 따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덕이란 시공을 초월?

    • 직접적인 모티프는 1차 세계대전기의 전투기 에이스인 “붉은 남작” 에서 따왔다고 하더군요.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빨간 색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예부대의 군복을 위한 색이었으니까, 관련된 이야기들도 더 많습니다. 일본 쪽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쪽으로 관심도 많기 때문에 건담 제작진들이 이 정도는 대략 알고 있었겠죠.

      결론적으로 직접적인 모티프는 아니겠지만, 간접적인 모티프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 빨간데다 뿔까지 달렸군요.

    •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그들이 얼마나 용맹했는지 짐작이 갈 만 합니다. 게다가 전장에서는 세 배 빠르게 움직였다던가(끌려간다)…

  7. 하코네류 갑옷이 붉은색인 이유반론
    일본어로 아카모노라고 칭하는 붉은색 염료의 주산지가 오다와라에서 하코네 일대라서 이지역 특산물은 목제품도 붉은색으로 염색한게 많고 갑옷도 붉은색으로 염색한거임
    붉은색 물감이 많이 들어간 전통 일본 목가인형 고케시도 이지역이 원산지
    과거 붉은색은 동양문화권에서 부정한 것을 몰아낸다는 파사의 의미가 깃들어있었죠. 부적도 붉은색으로 쓰고

    • 이이 나오마사의 부대가 빨간 갑옷을 입은 건 나오마사가 히코네 번주가 되기 전부터인데요? 무엇보다 말씀하시는 곳은 “히”코네가 아니라 “하”코네인 듯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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