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 이야기

1.

“관둬요~ 관둬~ ~(-_-)~”

올 2월쯤의 일이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무거운 아령을 들고 낑낑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장난을 걸었다. 근육 운동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따금 아령 무게를 늘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일단 처음 무게를 올리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정말 고역이다. 그리고 그 날 내가 하고 있던 삽질(-_-)이 바로 이것이었다.

http://www.flickr.com/photos/10141806@N07/5484368790

내게 장난을 건 사람은 같은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K씨였다. 한 세트를 마치고, 잠시 멈춰서 땀을 닦던 내게 그가 말을 걸었다.

“정말 열심히 하시는군요.”

“하하, 뭘요.”

“그렇게 열심히 할 이유가 있어요?”

내가 답했다.

“뭐랄까… 저는 무엇이든지 간에, 몽둥이만큼 바래도 바늘만큼만 이뤄지는 거[*]라고 믿어요. 그렇다면 되든 안 되든, 일단 몽둥이를 바래봐야겠죠?”

“음~ 그렇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대화가 지나가고, 우리는 각자 다시 운동에 열중했다.

2.

생전 처음 접하는 말이었을까? 전혀. 나는 그가 그 말을 알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뜻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스스로가 이 말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꽤 오랫동안 알아왔다. 비록 그는 나를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K를 처음 본 것은, 몇년 전 락커 Y가 진행하는 음악 프로를 방청하러 갔을 때였다. Tv에서 볼 때는 잘 모르지만, 1시간짜리 녹화를 하는 데는 1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출연진들이 무대에 오르내리고 준비를 하는 등에서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면 분위기가 산만해지니까, 출연진이 교체되는 사이사이에 입담 좋은 보조 진행자 한 명이 대신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방청객들을 웃겨서 주의를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당시 K의 포지션이 바로 이것이었1다. “재미있게 잘 하는군.” 녹화를 하는 도중 그는 몇 번이나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무대에 오르기 직전과 내려온 직후, 그는 반드시 성호를 긋곤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무대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 비록 이름은 몰랐지만, 그의 이미지는 그렇게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속칭 “떴다”. 나는 그를 처음으로 Tv에서 봤을 때의 그 반가운 기분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흡사 오래 된 친구가 금의환향한 것을 본 기분이었다. 이제 그는 국민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런 내력 때문에, 나는 그를 단순히 성공한 진행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극한의 노력으로 바늘을 넘어 몽둥이만한 꿈을 실현시킨 사람 – 내가 가진 K의 이미지다.

3.

중요한 건 K가 예외인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우리 헬스장에는 K씨 외에도 다른 연예인들이 여럿 드나든다.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똑같다: “돈 줘도 저렇게는 못 살겠다.” 아무리 몸으로 먹고 사는 직업2이라지만 그 바쁜 스케줄에 조금이라도 짬을 내어 운동을 하는 그들을 보다 보면 “국민 MC” 이런 타이틀은 아무나 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격전지에서 1/1000의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을,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인정한다. 하지만 더 희박한 확률을 넘고 살아남은 연예인들에 대해서는 만만하게 보는 경우가 많다. 첫째로 그들이 가진 이미지에 속기 때문이고, 둘째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걸 의심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운동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반대는 아닐까? 저 밝고 화려한 가면 속에는, 고행을 거듭하는 수도승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저 세계가, 쉽게 쉽게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세계도 아니지 않은가.

4.

한예슬의 촬영지 이탈 사건에 대해 이리저리 말이 많다. 사건이 정리되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만이다. 이 사건은 아직 전후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사자들의 단편적인 진술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자마자 한예슬에게는 개념 없다는 비난이 우기의 스콜처럼 쏟아져 내렸다. 흡사 기다리기라도 한 것 말이다.

필부의 작은 다툼에도 일단 양측의 이야기를 다 들어 보고 차분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이 당연한 원칙이 흡사 엿이라도 바꿔 먹은 분위기다. 한예슬이, 연예인이 만만해 보여서 그렇다고 하면 나만의 억측일까? Tv에서 자주 보니까, 쉽고 재미있는 이미지니까 실제로도 가벼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나? 행여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다면, 나도 한 마디만 할께: 니들, 돌아이가 진짜 돌아이로 보이니?

5.

“오랜만입니다. S양 인터뷰 잘 봤어요.”

2주 전이었다. 나는 운동을 하다가, 역시 운동을 하러 온 K씨와 마주쳤다. 그는 요즘 모 일간지에서 인터뷰 코너를 진행중이다. “하하, 보셨군요.” “그럼요. S양, 아주 성숙한 숙녀더군요. 다시 봤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이러한 잘못에서 크게 비껴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가수 S양은 진중한 이미지보다 명랑한 이미지로 더 알려져 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예능에서 인정 사정 없이 웃겨 준(…) 덕분일 게다. 하지만 K씨가 진행한 S양 인터뷰를 보면, 아이돌 걸그룹 멤버는 어디가고 웬 종가집 맏며느리가 나와서 인터뷰하는 분위기다.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비록 리더는 아니지만, S양은 그룹 멤버 9명 중 가장 경력이 오래 된 멤버다. 어려서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일본 소녀와 함께 가수 생활을 했다. 일찍부터 사회 생활을 했다는 얘기는 뒤집어 말하면 속이 꽉 영글 시간이 길었다는 얘기도 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S양에 대한 일화는 의외로 많았다. (두 명 빼고)동갑내기 그룹의 리더였던 K양이 너무 힘들어하자, 얘기 좀 하자면서 가장 먼저 달려가 위로했다던 사람이 그녀였다. 교포 출신인 멤버 T양이 역시 미국 살다 온 멤버 J양과는 달리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자, 걱정을 해줬던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아무도 거기에 주목하지 않았다. 기럭지 좋고 춤 잘 추고,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명랑해 보이는 그녀의 겉모습만 봤다.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잘 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6.

그러니까 인간들아, 제발 그 입 좀 다물어라.

비난은 좀 더 상황이 가려진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느냐. 너희는 어디, 그 반의 반이라도 될 줄 아느냐.

[*] 이 말의 출처는 일본 전국 시대의 군웅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조.

그런데 이번 사건, 사실 나도 좀 많이 황당하긴 하다.


  1. 최근, 가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Y의 매니저 역할을 했던 것 역시 K였다. 확실히 둘이 많이 친한 모양이다. 
  2. 사실 이것도 웃기는 게… 체력이 안 필요한 일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 

17 thoughts on “K씨 이야기

  1. K가 누구고 S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 너는 스스로를 얼굴치라고 평하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연예인 얼굴 많이 알고 있을 듯 :)

    • 태그 안 보셨나 보군 -_-; 그리고 내 얼굴치 증상도 많이 완화되서 요즘은 꽤 잘 기억한다네 :)

    • 아 -_-;; rss 리더로 글 읽고 댓글 단다고 홈페이지 들어와서 태그를 못 읽어버렸어 미안

      근데 난 수영이라는 멤버를 몰ㅋ라ㅋㅋㅋㅋㅋ

  2. 잘 읽었습니다.

    너무 자세히 써 주셔서 이니셜의 의미가 없는 듯 ^^;

    4에 대해서…. 확실히 요즘엔 빙산의 일각을 보고서 전부를 아는 양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뭐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요.

    ps;이번에도 제 못난 번역글을 링크해 주셨군요.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 하하, 소녀시대 팬이라면 웬만큼은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썼지요. :)

      빙산의 일각만 알고서 다 아는 듯 덤벼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병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연예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더 그런 것 같아요.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 친절한 태그 감사합니다. ㅋㅋㅋ 덕분에 인터뷰도 찾아서 읽었어요.
    강풀 작가와 S양의 인연을 들었을 때 참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그러네요.

    물론 본 주제는 한예슬입니다만… ^^;;;

  4. 연예인 이니셜엔 관심 없지만
    고어핀드님이 운덕후라는건 관심이 있네요 :)

    저도 좋아합니다 웨이트 ^^

  5. 오오
    연예인 다니는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대학원생의 위엄.

    갑부 덕후다

  6. K가 누굴까 궁금해서 블로그 와 봤더니 역시 태그에 정보가 있군요! ^^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7. 아하~ 참 즐겁게 읽었습니다. 고어핀드 님의 열정적인 글쓰기 비결이 체력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몸단련에 힘써야겠습니다!
    저는 요새 사정이 있어 유럽에서 생활 중입니다. 독일의 고성들을 둘러 보고 있는데, 고어핀드 님과 함께 하면 참 즐거웠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 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서울로 가게 되면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 어디서 뭘 하든 간에, 체력 없이는 일정 이상의 성취를 이루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미국 명문 대학에서 체육 활동을 중요시하는 이유를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밤톨대장님은 사법시험을 보셨었으니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유럽이라… 정말 좋은 곳에 계시는군요 :) 독일은 통일 국가의 성립이 늦었던 만큼 고성들도 많고 그만큼 성에 대한 이야깃거리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비록 저는 성 쪽 공부는 많이 한 편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저 역시 가보고 싶군요. 부럽습니다 :) 기회가 되신다면 꼭 고성 호텔에서 지내다 오세요. 일생에 몇 번 없는 기회일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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