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가 마고이치

  • 신장의 야망 팬 카페에 들렀다가 스크린샷 발견하고 포스팅.

신장의 야망: 천하창세 스크린샷

스즈키 시게히데. 훗날 사이가 마고이치라는 가명으로 더 유명해진다.

전국무쌍이나 귀무자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전국무쌍에서는 단지 당고(일본식 경단) 좋아하는 한량으로 등장했을 뿐이지만,

이래뵈도 우철포雨鐵砲를 개발, 사이가 철포대를 이끌며 비오는 날에도 혼간지의 땡중들과 철포를 쏴대며 오다 노부나가를 끝까지 괴롭힌 인물.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것이 많다. 사실 그가 과연 사이가 마고이치와 동일인물이냐는 것에도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 이후에는 오다 노부나가에서 맞섰던 전적 때문에 더더욱 그의 행적을 알기 힘들다.(장담컨대, 게임에서건 실제건 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가신들 중에 제일 똑똑하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일본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전혀 엉뚱한 데서 그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단 두번, “사야가”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임란 이등공신, 항왜 일등공신 사야가.

사야가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부대로 출병한 우선봉장이었으며, 부산포 상륙 직후 경상 좌병사 박진에게 투항한다. 경상도에서 의병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그는 1597년 울산성 전투에도 참전, 가토 기요마사를 패배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인조 6년에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아직도 사성 김해 김씨 집성촌에 모여 살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동양에 얼마 없던 조총 전문가였고 그의 부하들 또한 조총에 대해서 대단히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바다의 가야금”의 작가이며 철포 전문가인 고사카 지로는 사야가를 사이가 마고이치로 단정짓는다. 지금은 이 학설이 지배적인 학설이 되어 있다.(하라다 노부타네라는 다른 무장이라는 학설도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병력 보충이 봉쇄돼고 보급품이 막힌 왜군은 긴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토요토미가에게 불만을 품은 여여문, 산소우 등의 왜장이 1만여 명이나 되는 왜병을 이끌고 탈영하여 조선으로 귀순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심지어 고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최고위급 장성의 동생조차 탈영을 고민했을 정도였다.

사야가는 철포를 만들어 이순신에게 보냈으며, 그가 이끌었던 철포대 중 일부는 명량대첩의 현장에 있기도 했다. 1598년 울산성 전투에서 항왜들은 일본식 성에 대한 뛰어난 지식으로 전쟁 승리에 큰 공헌을 했으며, 조선인 성을 하사받고 조선인이 되어 살아간다.

그는 일본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인물이다. 지금은 일본인 장수들도 단지 문명 파괴 전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광기의 전쟁에서 개인이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본의 문화 시바 료타로가 쓴 “한(韓)나라 기행”에서 처음으로 일본 대중에게 소개되었으며 하세가와 쓰토무의 소설 “귀화한 침략병” 고사카 지로의 소설 “바다의 가야금” 등의 소설로도 다루어져 있다. 1992년 일본 NHK에서는 “조선출병 400년, 히데요시에게 반역한 일본 무장”이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기도 하여 그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이 친구 함 써보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정작 안 보인다 ㅜㅠ

One thought on “사이가 마고이치

  1. 일본측에서 나온 걸 보면 김충선은 이사고 가네가도인데, 박진이 필담중 초서체로 쓴 沙包門을 沙也可로 잘못 해석 했다는 주장을 합니다.
    김충선은 마쓰라 시게노부 휘하 철포대 중 소부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나중에 박진에게 투항 합니다. 물론 그 휘하 조총병을 이끌고 투항 했지만
    조총의 제작은 함께 투항한… 스즈키 마고사치 덕분이라고.
    스즈키 마고사치는 진종을 따르며 혼간지에서 노부나가에게 대항했던 진종의 일파로 당시는 아소 고레미스 소속이었으나 기요마사에게 고레미쓰가 인질로 잡혀 사이카의 진종 집단이 출병한 것으로 설명 하더군요.
    또 일본 측에선 당시 김충선의 무리가 3천명이 아니라 50여명 조총대 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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