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별(Identify) 시스템이 수행하는 기능들

미국식 RPG 게임에 보면 Identify 라는 기능이 있다. 마법이 걸린 아이템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를 식별(Identify)하는 것인데, 이걸 해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좋은 아이템이라 한들 사용할 수가 없다. 본래는 TRPG 게임의 Rule(=D&D)에서 비롯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룰이 서양식 판타지 세계관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상당히 흔히 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Baldur’s Gate 처럼 정통 D&D 룰을 적용한 게임은 물론이고 액션성이 강한 Diablo 같은 게임1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왜 이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냥 마법 아이템을 주워서 바로 쓰도록 하면 안 되는 것일까?

Baldur’s Gate의 “징 박힌 가죽 갑옷” – 식별 전.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는 쪽이다. 이 기능은 최대 3가지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능들을 수행하는 한, 이 시스템은 쓸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략성 부여

우선 이 시스템은 게임플레이에 전략성을 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임의의 미확인된 아이템을 확인하는 방법은 아래 두 가지다.

  1. NPC에게 돈을 내고 확인을 받는다.
  2. 파티원이 가지고 있는 확인 능력으로 식별한다. 마법사나 음유시인, 사제 클래스 캐릭터만 가능하다.

D&D 룰 시스템에서 게임 초반2의 경우, 일부 클래스는 다른 클래스에 비해서 효용도가 낮다. 예를 들어서 마법사나 음유시인은 초반에 전사나 레인저만큼의 전력을 보여 주지 못한다.따라서 마법 아이템을 식별해야만 사용할 수 있도록 강제하고 초반에 효용이 낮은 클래스에 한해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면, 게이머는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하나는 당장 전투력이 높은 캐릭터들로 이 경우 아이템을 식별할 때마다 마을에 가서 돈을 들여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또 하나는 당장은 전투력이 낮은 클래스의 캐릭터를 데리고 다니면서 식별을 하는 경우다. 이 경우 전투는 약간 어려워지겠지만 주운 마법 아이템을 거의 바로 사용할 수 있으며, 별도의 돈도 들지 않는다.

Baldur’s Gate의 “징 박힌 가죽 갑옷” – 식별 후.

즉, 게이머에게 유의미한 선택을 하도록 함과 동시에 게임의 밸런스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룰이지만,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취감 자극

두 번째, 이 시스템은 게이머의 성취감을 자극한다. 마법 아이템이란 게임의 룰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력에 의해 지급된 보상에 해당한다. 이 흐름은 대충 다음과 같다.

  • 몬스터를 잡는다 (노력) → 마법 아이템을 얻는다. (보상)

그런데 식별 시스템을 도입하면 이 과정은 아래 두 단계로 나누어지게 된다.* 몬스터를 잡는다 (노력) → 식별되지 않은 마법 아이템을 얻는다. (보상)
* 식별되지 않은 마법 아이템을 식별한다 (노력) → 식별된 마법 아이템을 얻는다. (보상)

즉, 두 번 보상을 받게 된다. 앞의 흐름과 달라진 점은 전자가 우연 – 몬스터가 좋은 아이템을 떨군다는 – 에 의지하는 반면, 후자는 상당히 명확한 목표와 보상 – 식별되지 않은 아이템을 식별한다는 것 – 을 게이머에게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는 우연에 의지하는 시스템에 비해 게이머의 성취 동기를 더욱 강력하게 자극3한다.### 판타지적 관습

그러면 Diablo 같은 경우는 어떨까? 사실 Diablo의 식별 시스템은 1, 2번 어느 쪽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캐릭터 하나만 달랑 들고 플레이하는 게임인 데다가, 식별도 책 한 권 들고 다니면 모두 해결된다. 그러다보니 어느 쪽 기능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하기 힘들다.

이 경우는 일종의 관습이라고 봐야 할 듯 싶다. 게이머들이 “마법 아이템은 식별해야 사용할 수 있다.” 는 걸 상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별 의미가 없더라도 그 시스템을 탑재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기 때문이다. 기능적으로는 장식에 불과하겠지만, 게이머에게 현실적인 기시감을 줄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일본식 RPG 게임은 처음부터 이런 개념이 없으며 미국식 RPG 게임에서도 식별 시스템은 점점 더 없어져 가는 추세다. 이런 게임들에서 1, 2의 목적을 어떤 기능들이 대신 수행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1. 그래서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이건 RPG가 아니라 액션 게임이다.” 라고 하여 정통 RPG 매니아들에게는 심하게 까였다. 요즘은 이런 사람을 보기 거의 힘든 것 같지만. 

  2. 즉 꼬꼬마 저렙 캐릭터들이 돌아다니는 수준. 

  3. 뒤집어 말하면, 이렇게 목표 의식을 자극하는 것 자체가 관련 인터페이스 디자인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