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소박함의 미학

터미널은 꽤나 소박해 보이는 영화다. 언젠가부터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뭐랄까, 일종의 눈요깃거리로 전락해 버린 듯한 인상이 짙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특수 효과 치장을 하지 않으면 영화 축에도 못 끼는 것만 같다.

본래 영화라는 것 자체가 “움직이는 사진에 대한 시각적인 놀라움”에서 시작했다지만 그건 엄연히 말하면 영화라기보다는 활동 사진이고, 제임스 포터 감독의 영화 “대열차강도” 이후 영화는 이야기였다. 헐리우드는 그것을 발전시키면서 성장해 왔다. 지금도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기법이나 편집 방법을 “고전적 헐리우드 기법”이라고 할 정도다.

그런데 그게 어느 아침에 일어나보니 죄다 없어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요즘 헐리우드 영화는 갈수록 재미가 없다. 데스 스타를 공격하는 반란군같은 시각적 놀라움도 한두번이지, 자꾸 보다 보면 물린다. 스크린 안에서 살아가고 고민하는 사람 냄새라는 것이 그리워진다. 스필버그 감독이 “캐치 미 이프 유 캔” 이후로 좀 더 고전적인 스타일의 영화들, 컴퓨터 특수 효과로 만화 같은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영화를 찍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최근에 나온 우주 전쟁은 도저히 아니라지만.)

견고한 성채 무너뜨리기

그러니까.. 음.. 당신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 “터미널”은<스미스씨 워싱톤 가다>로 대표되는 프랭크 카프라식 인민주의 코미디의 변주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는 대강 다음과 같은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얼굴 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거대한 기성 제도가 우연히 끼어든 한 ‘작은 남자’(little guy)에 의해 삽시간에 유쾌한 혼란에 빠지고 그는 민중의 영웅이 된다. 스필버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길 잃은 소년”이 그 “작은 남자”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장치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특수효과 하나 없는 영화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기계처럼 차갑고 짝짝 아귀가 맞아 벗어날 방도가 안 보이는 사회 제도 속에 유쾌하게 웃고, 사고를 저지르고, 도움을 주고 받고, 사랑에 빠지고, 곤경에 처하는 사람들이 있다. 둘의 명백한 대조가 더더욱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하나의 갈등이 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기에(크라코지아의 내전이 끝나느냐는 전적으로 나보스키의 손 밖에 있다.), 영화는 하늘에서 똑 떨어진 나보스키가(?) 공항에 자리잡고 살면서 영어를 배우고, 주변 사람들과 가족이 되어가는(다시 말하지만 이건 스필버그 영화다.) 일련의 사건들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현대 미국의 동화

그러면 스필버그 감독은 왜 하필 나보스키를 스크린에 담았을까? 그에게는 영화화를 기다리는 시나리오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 물론 위에서 언급한, 좀 사람 냄새가 나는 화면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도 다 채워지지 않았음이 가장 큰 이유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는 듯하다. 본래 그는 모사드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의 아랍 테러리스트들을 다룬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거 찍었다가는 알 카에다의 살생부에 그의 이름이 올라갈 확률이 99.99%다.(아니, 이미 올라가 있는지도 모르지) 그는 부시의 반테러 전쟁을 지지한 바 있고, 잘 알려진 대로 유태인이다. 아랍의 적이 되기 위한 조건을 이렇게 고루고루 갖추는 것도 힘들다.

그래서 그 대타로 선택된 프로젝트가 이 “터미널” 이다. 그는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바로 공항 터미널 안에 미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 밝힌 바 있다.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꿈을 찾아 모여드는 곳, 그리고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곳, 권세와 욕심뿐인 악당이 버티고 있지만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만나고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 노력을 통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곳. 이것이 스필버그가 생각하는 미국의 이미지인듯하다.

실제로 나보스키는 이 모든 것을 경험한다 – 아버지의 소원을 대신 이뤄 드리고 싶은 소망에 부풀어 뉴욕에 오고, 비행기 안에서 조국이 내전에 휩싸이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할 처지가 된다. 게다가 승진 욕심에 가득찬 공항의 보안 책임자는 그런 나보스키가 못마땅해 쫓아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는 인도인 청소부 할아버지와 흑인 경비원, 주방의 히스패닉 청년과 친구가 되고, 영어 한 마디 하지 못하던 처지에서 공부를 해서 영어를 하게 되고 공항 안에서 적지 않은 돈도 벌게 된다.

“실제로 미국 땅에 발을 밟지 못하는 한 남자가 터미널 안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경험하는 것은 심오하고도 아이러니한 일” 시나리오 작가의 말이다. 나보스키가 겪는 일은 말 그대로 아메리칸 드림이고, 미국의 모든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왜 그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땅으로 몰려왔는지를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필요성이라는 철학적 사색을 하면서.

박제된 야만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던가? 이 영화의 모델이 된 샤를 드 골 공항에서 수년간 살고 있는 이란의 정치난민 나세리의 삶은 나보스키의 그것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그는 단지 돌아가는 게 싫은 정도가 아니다. 그는 돌아가면 죽는다. 이란의 전제 왕정을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가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난민증을 분실한 그를 어느 나라에서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늘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높은 담벼락, 국제관계의 골목길에서 좁은 터미널에 쪼그려 앉아 있다. 이렇게 현실은 스필버그의 스크린에 올라온 아름다운 미국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 영화는 개봉 후 논란에 휩싸였다. 잔인하기만 한 현실을 단순하게 사탕발림으로 꾸며 놓았을 뿐,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따위는 저세상으로 간단히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 특출날 것도 없는 시나리오도 문제가 됐다. 톰 행크스가 주연 배우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 영화 엎어졌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현실과 시나리오가 죽은 자리는 “외계에서 온 가슴 따뜻한 ET”와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졌답니다”라는 메르헨틱한 결론으로 채워질 뿐이다. 대체 뭐냐, 이건.

틀림없이 이 영화는 사랑스럽고 타인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만,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평론가의 한마디마냥 ‘인간적인 코미디나 관료 사회에 대한 풍자가 되다가 만 착한 존의 멜로드라마’에 그쳐 버렸다. 그 평론가 말따마나, ‘스필버그는 다음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쥬라기 공원>으로 떠나버려야’ 하는 걸까.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웬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랄까, 따뜻한 온돌방 위에 앉았는데 어째 얼음장 위에 앉은 듯한 느낌이랄까. 틀림없이 따뜻한 화면과 친절한 미소를 띠는 대사와 사건들을 보고 있음에도 뭔가 이해못할 차가움이 느껴지는 뒷맛이었다. 내가 느낀 묘한 기분은 대체 무엇일까. 모를 일이다.

<사족>

<터미널>의 실제 주인공 나세리는 아직도 프랑스 드골 공항에 살고 있다. 그는 빅토르와 달리 공항을 떠나지 않으며 공항 모두의 환영을 받는 존재 역시 아니다. 그는 공항 한켠 지하 상가의 약국과 옷 가게 사이의 작은 틈새 집에서 생활한다. 올해로 16년째다.

나세리가 언제 집으로 갈 수 있을 거냐고?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 없다. 당신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