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동인의 저변

2005년 8월 7일 오전 12시

영국 포츠머스 – Mary Rose 호 전시장 기념품점

“우리나라에서 뭐 좀 깊이 파려고 하면 외국어는 기본이다.”

역사든 만화든, 좀 깊이 파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우스갯소리다. 그런데 현실은 이게 웃어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 치고 일본어를 못 하는 사람은 드물1다. 역사 매니아들도 마찬가지다. 영어로 된 책을 사는 건 기본이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책을 주문해다 읽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가 관심 가진 분야에 깊은 지식을 구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정성은, 적어도 그 방식에 있어서 화학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어를 공부하는 화학자의 그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2.

이들이 고행을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한 분야든, 깊은 내용을 담은 책3이 출판되기 어렵다. 시장이 워낙에 협소하기 때문이다. 설령 출판되더라도 금방 절판되고, 못 구하게 된다. 매니아들은 이런 데 시달리는 데 익숙하다. 원하는 것이 발매되면 일단 품절되기 전에 구입하고, 깊은 정보를 필요로 하면 원서를 탐독한다. 한국에서 매니아의 삶이란, 대개 이런 식이다.

포츠머스 해군 박물관의 기념품점 코너. 그야말로 서점을 방불케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수준 보려면 국립 중앙박물관에 가야 한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박물관이었다. 풍부한 전시물 x 상세한 설명의 조합도 충실했지만, 기념품점은 그야말로 “지름신을 대량 소환” 하기에 충분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작은 서점이었다. 그뿐인가. 역사 동인이면 좋아할 만한 스케일 좋은 장난감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예전에 갔었던 일본도 그 수준이 상당했지만, 이 정도는 상상도 못 했다.

같은 곳에서 판매하던 빅토리 호의 모형. 여기서는 모형이나 그림들만 따로 팔고 있었다.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던 것이 생각났다. “영국인들은 역사를 탁월한 오락처럼 즐긴다.” 나는 시오노 나나미를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이 대목에서만은 깊은 공감을 느꼈다.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Waterstones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었는데, 역사 코너가 한 층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 벌려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도 해도 역사 코너는 여기의 절반 정도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다. 내가 박물관과 서점에서 확인한 것은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거대한 공급이었다. 이 공급을 떠받치는 수요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대략 짐작이 갔다. 각종 양질의 책들이 출판되어 지구 반대편의 매니아들까지 목을 매게 하는 배경은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처럼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인구가 적고, 시장도 협소한 곳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지극히 탐났던 중세 유럽의 검과 검술에 대한 책. 결국 사오지는 못했다.

상점에서 뭔가를 산 것은 아니다. 그저 이것저것 아이쇼핑을 즐겼을 뿐이다. 돈은 모자랐고, 덕분에 구태여 돈을 들여가며 손에 넣을 뭔가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책이나 기념품 대신 부러움을 가득 안고 상점을 나섰다.


  1. 수준 차이는 좀 있지만. 

  2. 심지어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전세계 공학 논문의 상당 부분이 독일어로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3. 만화책도 마찬가지. 엄청나게 잘 팔릴 것 같은 물건이 아닌 이상 국내에 잘 출시되지 않으며, 영세 출판사가 번역을 맡을 경우 출간 도중에 출판사가 도산하면서 작품이 공중에 붕 떠버리곤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요즘은 이런 케이스가 많이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