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태도

‘더 많은 복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유통기한은 이미 끝났다.

1.

여씨춘추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치열한 전쟁이 이어지던 전국시대, 서쪽 진(秦)나라와 각축을 벌이고 있던 위(魏)나라의 서쪽 지방에 오기(吳起)라는 장군이 부임했다. 오기는 밤에 남문 밖에 기둥 하나를 세워 놓고 도시 사람들에게 공포했다:

누구든지 이 기둥을 넘어뜨리는 이가 있으면 벼슬을 주겠다.

아마 이 황당한 포고문을 본 백성들은 이게 대체 뭥미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겨우 기둥 하나 넘어뜨리면 벼슬을 준다는데 누가 그걸 믿겠는가. 실제로 기둥이 세워진 첫날 아무도 이 기둥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 하나가 나서서 진짜 기둥을 넘어뜨린 것이다. 보고를 받고 나온 오기는 기둥이 넘어진 것을 확인하더니, 정말로(!) 그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 다음 날도 남문 밖에 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이번에는 아예 땅 속에 깊숙히 박아 놓아서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도 도저히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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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가 이런 번거로운 연극을 꾸민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스스로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흔히 병법가로만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오기는 정치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서 이런저런 임기응변을 부리는 것보다 평소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정치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다.2 오기는 위나라 출신도 아니고3 귀족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앞으로 다스리며 진나라와의 전쟁을 치러 나가야 할 백성들은 국경 지역에서의 전란에 시달리면서 눈치나 보는 게 일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신뢰가 생길 수가 없다. 오기는 백성들과 신뢰관계를 만들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전국시대 최고의 전략가로 손꼽히는 오기의 무패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후 오기는 76번 싸워 64번을 이기고 나머지는 비겼다고 한다. “인육을 먹고 인골로 취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군대는 손빈과 오기의 군대 뿐이다.” 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오기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의 조직력은 강고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모함을 당해 위나라를 떠나기 전까지, 서쪽의 진나라는 위나라를 밀어낼 생각조차 못 하고 계속 수세에 몰려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사소한 나무 기둥 하나였던 것이다.4

2.

조금 뜬금없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요즘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 일화를 먼저 떠올린다. 다들 알다시피 복지는 현재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고 지난 대선 때는 주요 의제이기까지 했다. 물론 복지 예산 비중이 낮기로 악명 높은 대한민국에서 과다 복지 운운하면 영양실조에 걸린 주제에 비만을 걱정하는 격일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은 OECD에 등수 깔아주려고 들어갔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마당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편적 복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유가 없을까? 전혀. 나는 보편적 복지에 그리 부정적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복지 확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름 이유는 있다고 생각한다.

춘추 시대의 과(戈). 1936년, 중국 안휘 성 출토. 마카오 박물관 소장.

세금이 들어가서 편리한 것은 그 유용성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 반대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 굳이 미국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과 비교를 하는 해서 설명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반면 세금이 늘어나는 것, 이상한 데로 새는 건 아주 명확하게 보인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면 연말 정산 폭망했다는 사람들, 담배값이 올라서 스트레스 받는다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세금 새는 거? 말이 필요 없다. 사소하게는 쓸데없이 비싼 기자재 구입부터 창조경제란 이름으로 뿌려대는 예산까지, 끝이 없을 정도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보편적 복지, 혹은 복지 확대는 어느 정도가 됐건 증세를 요구한다. 하지만 정작 세금을 내는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내가 더 낸 세금이 복지 혜택으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백보 양보해서 일이 정말 잘 풀린다 해도, 세금을 더 내는 시점과 복지 혜택을 받는 시점에는 상당한 시간 차가 존재하는데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확실히 주어진다는 보장도 없는 먼 훗날의 복지 혜택 같은 건 필요없으니 당장 내 돈 가져가지 말라고 반응하는 게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소리가 있다: “지난 정권 때 날려먹은 돈이 수십 조[1][2]가 넘는데, 그렇게 낭비할 돈은 있고 애들 밥 먹일 돈 수백억은 없다는 거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은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첫째, 복지 정책에 예산을 투입한다고 해서 이미 허공으로 날아간 돈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복지 예산 확충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보기에 따라 형이 가산을 탕진했으니 동생도 그만큼 탕진하겠다고 나서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둘째, 수십 조의 돈이 허공에 흩어지는 와중에 정부의 예산 감사 기능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복지 정책에 쓰겠다고 걷어간 세금이 제대로 집행될 거라는 보장이 대체 어디 있나? 슬픈 현실이지만, 복지 확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염려는 극히 현실적이다. 적어도 이 사람들의 눈에는, 세금은 오르고 국가 재정은 엉망이 되었는데 세금 도둑들만 희희낙락하는 최악의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3.

전국시대의 동전. 마카오 박물관 소장.

틀림없이,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냈다. 불과 10년전만 해도 상상을 못 하던, 보편적 복지라는 주제가 사회적 의제가 되는 상황이 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들 주민의 생사여탈권을 부여받고 부임한 오기만한 권위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자들에게서 어떻게 신뢰를 얻어낼 수 있는지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기도 남문 앞에 나무기둥을 세워 놓고 번거로운 연극을 벌였는데 말이다. 장하준 교수 같은 분이야 “세금을 낸 만큼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까 부담이 아니다.”5 라고 하시는데, 국민들 입장에서는 혜택을 볼 거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고 당장 돈까지 나간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도저히 신뢰를 줄 수가 없다. 오랜 전란에 시달려 온 국경 지역의 백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부임한 외국 출신 장군을 믿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복지 정책이 망국적 사치나 낭비로 인식되는 현실에 분통을 터트린다. 아마 “복지는 공동구매와 같은 것” 이라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도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필요한 건 더 많은 논리와 당위가 아니라, 비록 작고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성공의 경험이다. 남문 앞 나무기둥을 넘어뜨린 사람이 벼슬을 받는 걸 직접 봐야 한다는 얘기다.

4.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세세한 영역으로 관심을 옮겨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어디에서 세금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어느 영역에 복지 예산이 더 필요한지 등의 주제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논의가 가능한 지점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성공의 경험도 가능할 것이고 복지 확대에 대한 주장 역시 탄력을 받을 것이다.6 이미 알 사람 다 알고 동의할 사람 다 동의한 “더 많은 복지가 필요하다” 라는 명제를 무한반복하는 것보다 말이다.

5.

그런 의미에서, “더 많은 복지가 필요하다” 라는 주장의 유통기한은 이미 끝났다.

* 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시사인 천관율 기자의 이 기사가 상당히 의미 있는 통찰을 보여 준다: “여론은 현재의 복지 수준이 경제력에 견줘 부족하다고 느낀다. 복지 과잉·복지망국론이라는 보수 블록의 주장은 공감대가 넓지 않다… 하지만 세금이 공정하지 않다는 대단히 강한 불신이 이런 현실 인식을 뒤집는다. 복지 확대는 곧 증세를 떠올리게 하는데, 정작 세금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바닥 수준이다. 불신의 강도도 이례적으로 높다” 강력 추천하는 기사.

예산의 분배와 집행에 대해서는 같은 기자의 다음 기사도 추천한다: 우리가 몰랐던 예산 정치의 맨얼굴 언론 보도에 이런 기사가 더 많아지고 또 관심을 받아야 마땅한다고 확신한다.


  1.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상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와 똑같다. 다만 주인공이 위(魏)나라의 장군 오기가 아니라 진(秦)나라의 재상 상앙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기보다 한 세대 정도 뒤 사람이었던 상앙이 오기의 방식을 흉내낸 것으로 볼 때도 있지만, 법가 사상가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수법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사기열전이 워낙에 유명한 데다가 진나라가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데 상앙의 개혁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 때문에 사기에 실린 버전이 가장 유명한 편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한비자에도 전한다. 한비자 역시 오기, 상앙과 마찬가지로 법가 사상가다. 
  2. 오기의 일화 중에 유명한 것 하나로, 전쟁터에서 명령도 내리지 않았는데 적에게 달려들어 수급을 둘이나 가지고 돌아온 병사를 베어 버린 이야기가 있다. 군리가 ‘저런 용감한 병사를 베어서는 안 된다’며 말렸는데, 그냥 베어버렸다고. 
  3. 위(魏)나라 동쪽의 위(衞)나라 출신. 
  4. 충무공 이순신의 어록으로 유명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가 원래는 오기의 가르침을 정리한 책인 『오자(吳子)』 치병(治兵)편에 나오는 문구다. 이어지는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능히 두렵게 할 수 있다.” 는 말 역시 『오자(吳子)』 여사(勵士)편에 나온다. 
  5. 장하준 교수가 복지를 ‘공동구매’에 비유한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미 2012년 9월 <프레시안> 창간 11주년 특별 강연회에서부터 이 표현이 등장하며, 그 뒤로도 언론 인터뷰가 있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6. “이러한 주제들은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당장 기초생활수급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찾아보길 권한다. 소가 웃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제도 때문에 제도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2015년 3월 현재 네이버 뉴스 기준으로 ‘무상복지’ 검색 결과가 9만 건이 넘게 나오는 반면 ‘기초생활수급제’ 검색 결과는 50개도 안 된다. 최우선적 복지 제도 중 하나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