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미술관 – 렘브란트의 “야경” – #1

2005년 8월 13일 오후 2시 30분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대항해시대 온라인” 을 해보면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네덜란드의 바다 여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1568년, 네덜란드는 본국인 에스파냐에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에스파냐의 착취에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에스파냐의 입장에서 본 네덜란드는 말 그대로 “도깨비 방망이” 였다. 당시 에스파냐는 거대한 식민지와 무적함대를 거느리고 세계 최강국으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속은 아주 썩어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와 지금의 네덜란드. 사실상 거기가 거기다.

에스파냐에게는 일단 남미 신대륙에서 굴러들어오는 많은 은과 귀금속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스페인 자국의 산업 발전에는 태만했으며, 단순 소비위주의 경제로 전락하게 된다. 예컨대 농업과 토목의 전문가들이었던 무어 인들을 이교도라고 탄압해서 외국으로 도망치게 만들었고, 유태인 탄압으로 상업이 엉망이 되었으며, 무적함대를 만든답시고 나무를 마구 베어대어 토지를 황폐하게 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스페인은 개발도상국이다.)

이러고도 에스파냐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에는 모자랐는지, 350여개의 도시가 번영하는 네덜란드를 자꾸 쥐어짜서 돈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에스파냐의 착취 그리고 결정적으로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종교탄압에 견디지 못한 네덜란드 17주 그 중에서도 북부 7주는 드디어 1568년, 독일의 명문 낫사우 가의 혈통인 오라니에 공작 빌렘 1세(사진)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반란의 깃발을 들게 된다.

당시 유럽의 군대는 할버드로 무장한 용병들이 주류였다. 토지의 장자 상속과 전쟁으로 인해 무일푼이 되어 떠돌아다니던 난민들은 결국 몇 푼의 급료에 팔려 용병이 되었고 그들은 집단을 이루어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당시 유럽에서는 지금과 같은 상비군의 개념은 거의 없었고 그저 전쟁이 날 때마다 이 용병 – 이라기보다는 무기를 든 부랑자 떼거리 – 들을 고용해서 전쟁을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언제 날지도 모르는 군대를 큰 돈 들여서 항상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용병제도의 취약점은, 마키아벨리가 지적한 대로 “전쟁이 되지 않는다” 는 점에 있다. 용병은 틀림없이 돈을 받고 전쟁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들이 받는 급료는 목숨을 걸 만큼 그렇게 큰 돈이 아니다. 자연히 그들은 질 것 같은 전쟁에서는 일단 도망가 버린다. 본질이 칼 든 부랑자 떼거리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도둑질, 약탈, 방화, 살인, 무전취식, 강간 등에 열중하여 용병 주둔지의 백성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오죽했으면 마키아벨리는 “용병은 국가방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평화시에는 그들에게 약탈당하고, 전쟁시에는 적에게 약탈당한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군주 자신의 군대이다.” 라는 생각을 군주론에서 설파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에스파냐군만큼 대규모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던 네덜란드 군은 처음부터 크게 패배했다. 적군의 수가 아군보다 많은 것을 본 네덜란드 군 용병들이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1578년 유트레히트 동맹을 결성,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을 선언하지만 1584년 지도자 빌렘 공이 가톨릭 광신자 제랄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하기까지 한다. 스페인은 독립선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델프트에서의 빌렘 1세의 암살 – 사건의 현장은 지금 박물관이 되어 있어, 처참했던 그 때의 상황을 그려보기에 충분합니다. 암살 당시 총알에 움푹 벽이 들어간 것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언뜻 보면 대포라도 맞은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