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미술관 – 렘브란트의 “야경” – #2

2005년 8월 13일 오후 2시 30분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마우리츠의 군제개혁

“…이곳에서는 평시에도 3만의 보병과 2천6백의 기병이 상비되어, 대포의 집적소도 확보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놀라운 일은 병사들의 급료가 확실하게 지급되어, 병사들의 기강확립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자신의 집이 병사들의 숙사가 되는 것을 꺼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내나 딸을 병사들과 함께 나눈채 집을 비우는 일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빌렘 1세의 아들 마우리츠의 시대에 네덜란드 주재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가 본국의 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 하나만으로도 네덜란드 군대가 “칼 든 부랑자” 용병들과는 사뭇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단 한 세대만에, 네덜란드 군은 완전히 변한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 군을 묘사한 타일(델프트 도자기 박물관 기념엽서에서)

마우릿츠는 동생 프레드릭 핸드리크, 사촌형제인 지겐후작 요한(훗날 유럽 최초의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한 인물) 등과 협력해서 대담한 군제개혁에 착수한다. 압도적인 군세에 놀라 도망만 다니는 용병 따위는 필요 없으므로, 차라리 민병을 주력으로 하는 군대를 만들기로 한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일단 그들은 병사들에게 급료를 확실히 지불하여 병사들의 반항의 원인을 제거했다. (당시 병사들에게 임금 체불은 일상사였다.) 그리고 엄격한 훈련과 군율로 병사들을 단련하고, 명령 계통을 확실히 하여 병력의 빠른 행동을 유도했다. 네덜란드 병사들은 함께 싸우고 함께 밥을 먹으며, 함께 참호를 파고 함께 잤다. 결과적으로 “나”라는 의식을 적극 억제하고 공병이든, 창보병이던, 화승총병이던 정말로 칼뱅파의 사람들답게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행하는 현대적인 군대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건설된 프로 민병대는 기병과 포병의 전면적인 도입 등으로 크게 강해졌으며, 에스파냐 군대에 승승장구, 결국 네덜란드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을 완전히 승인받게 된다.

===== ===== ===== =====

언제나 사람들이 몰리는 국립미술관 최고의 전시물, “야경”

렘브란트는 익히 알려진 대로, 자화상을 상당히 많이 그린 화가입니다. 이 많은 자화상들 중에서 젊은 시절의 자화상 한 장이 눈길을 끄는데, 렘브란트가 네덜란드 민병대의 갑옷을 입은 그림입니다. 전장의 주류가 화승총(미술관에도arquebusier라고 적혀 있습니다.)과 할버드로 무장한 병사들로 옮겨간 16세기 말에 많이 사용된 하프 플레이트로, “야경”의 주인공들도 이것을 입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대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군복무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종종 자신의 고객인 네덜란드의 시민들과 공유했던 애국심을 이런 식으로 형상화하곤 했습니다.

어떤 이는 당시 네덜란드 사회의 위대성을 “고관대작이나 귀족의 자제가 아닌, 평범한 민병이나 직물 조합의 간부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사회 분위기로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렘브란트의 그림 중에 귀족은 별로 없습니다. 그의 고객 그리고 그림에 그려진 인물 대부분이 상인이나 의사, 군인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경”은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보통 그림에는 이름난 사람이 그려지기 마련입니다. 사회적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을 묘사한 그림은 많지만 힘없고 고달픈 백성을 그린 그림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정작 일을 해 나라를 지탱하는 사람들은 한줌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름없는 백성들인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야경”은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가운데 있는 부대장을 제외하면 모두 일정한 돈을 각출해 낸 평범한 병사들이었습니다. 이 평범한 민병들은 당시 네덜란드의 시민인 동시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성공시킨 주역들이었습니다.

필멸의 존재로서 영원에 이름을 남긴 이 민병들… 렘브란트에게는, 이들야말로 기나긴 암흑시대를 밝혀 주는 찬란한 빛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어둠 속에서의 찬연한 빛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