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병의 시작

승병의 등장

우리나라에서 승병은 언제부터 등장하게 되었을까? 정확한 것을 알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고려사》<최영전(崔瑩傳)> 에는 “고구려 때 당(唐)나라 태종이 침입하자 고구려의 승려 3만 명이 승군으로 출전하였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의 승려는 불교 승려가 아니라 무당들이라는 의견도 있는 걸 보면 확실하지 않다. 당시 고구려의 집권자였던 연개소문은 기존 귀족들과 친했던 불교계를 억압하고 도교(=샤머니즘)를 장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승려들이 칼을 들었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또, 당시 승려들에게 있어 호국이란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여 나라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 팔만 대장경에서 보듯이, 호국이 꼭 병장기를 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이들이 불교 승려였다는 해석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승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라 말기의 기록이다. 불교를 숭상하던 신라시대, 사찰에는 넓은 땅과 노비들이 제공되었다.

신라 말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하기 시작하자 자연히 이 절들은 농민 반란이나 도적떼의 타겟이 되었다. 따라서 사찰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전투력이 필요해졌는데, 대략 사찰에 소속된 노비들을 승병으로 편성하게 된다. 해인사에서 나온 비문에는 승병을 조직해 주위의 농민 반란을 진압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한국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승병들이다.

이후 각지의 군벌들이 칼들고 싸우는 난장판이 벌어지면서 승려들 역시 칼을 들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난세에는 승려는 살생의 도구를 들면 안된다는 계율 따위는 간단히 무시되기 십상이기 마련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하겠다.

뭐 멀리 갈 것도 없이 승려로서 칼을 들고 유력 군벌로 등장한 궁예 자체가 승병이다.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서 승병은 자주 역사 기록에 등장하게 된다. 고려의 문벌 귀족들이 땅과 노비를 사찰에 헌납하면서 여전히 사찰이 거대한 재산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자체 경비력인 승병도 필요했다. 자연히 승병들이 “칼질”을 해야 할 상황도 많아져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에 평양 지역의 승병들이 연루되어 있는가 하면 이자겸의 난과 같이 귀족들과 결탁해 정치적인 싸움질에 열중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이 경우에도 역시 수원승도(隨院僧徒)라 하여, 군현의 주민처럼 사원에 부속되어 있던 백성들이 주로 편성 대상이 되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화려한 불교 행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거대한 소비의 주체인 동시에 생산의 주체였던 사원 아래에 엄청난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참고로 고려 시대의 거대 사찰인 보제사는 건물만 1천 채가 넘었다고 한다.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윤관이 편성한 별기군에 항마군이라는 승병부대가 조직된다. 별기군은 총병력이 17만으로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 그리고 기타 특수병으로 편성되었는데, 승병인 항마군이 기타 잡병이 아닌 17만 대군의 주축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는 고려에 승병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몰락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왕조 이후, 숭유억불을 표방하며 등장한 조선 왕조는 시작부터 불교를 억압한다. 새로운 왕조를 개국한 신진 세력들은 고려 말 불교계의 타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거침이 없었다.

특히 태종은 불교를 지독하게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사찰이 가지고 있던 노비와 땅을 빼앗아 신진 사대부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모자라 승려가 될 수 있는 사람 수를 제한하는 법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말년에 태조 이성계의 묘를 만드는 데 있어서 무학대사와 같은 승려와 가까웠던 아버지를 생각한 그는 마지못해 아버지의 묘 근처에 원찰(왕릉 근처에 명복을 빌게 하는 절)을 세우게 했으나, 자신의 능에는 “내 묘자리에 더러운 중들이 가까이 하게 할 수 없다.” 며 절대 세우지 말라고 엄명했다.

이후에도 불교 탄압은 계속되었다. 사찰에 부과된 부역의 종류는 100개가 넘어 승려들은 왕릉이나 성곽 공사 등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미 사찰 소유의 땅과 노비도 전부 빼앗긴 승려들은 밥 굶기를 밥 먹듯 해 도망가는 자가 속출했다. 심지어 연산군은 절을 기생방으로 만들고, 비구니를 기생으로 삼으라는 둥, 절에 조상의 묘를 세우라는 둥 기막힌 명령까지 내렸다.

유생들은 불상의 목을 잘라 우물에 던져 넣거나 태워 없앴다. 고려 때 만들어진 대장경은 쓰레기 취급을 받아 일본 사신에게 떠넘겨지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불교 최악의 암흑시대였다.

9 thoughts on “승병의 시작

  1.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고구려의 승군이 무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글의 원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호국불교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는데, 호국불교의 기원에 대한 서술부분에 참고하고 싶습니다.

    • 원출처는… 잊어버렸습니다 -_- 지도로 보는 한국사였던가? 거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차라리 승병에 대해서 논문을 검색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문에 나온 승병의 기원은 박노자 교수의 < 승병사와 사명대사>라는 논문에서 참고한 것입니다.

  2. 도교=사머니즘이라는 소릴 누가 했는지 모르겟지만…그 말을 처음 한 인간이 누군지는 몰라도 잘못 알고 있네요. 도교는 물론 그 근본은 사머니즘이 맞습니다만 불교, 도가철학, 음양오행론, 풍수지리설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진 종교지 단순한 샤머니즘 자체는 아닙니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에서 다 호국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니고, 불경 중에서도 인왕경처럼 밀교계 경전이나 밀교풍이 강한 경전에서 중시됩니다. 그리고 조선이 불교 최악의 암흑기라는 것은 양란 전 이야기입니다. 양란 이후엔 승병 활동으로 인해 국가/유림이 암묵적으로 억불책을 거두면서, 각종 대형 사찰 복원불사가 이루어지는 등 불교가 상당히 살아납니다. 현대 한국 사찰에서 보이는 종파와 모시는 주불이 다른 경우 등 이른바 통불교 현상도 사실은 이때 완전히 확립되었습니다. 뭐 억불정책을 부활시켜 도성 출입 금지 등을 강화했던 정조도 수원에 용주사라는 조포사를 만들었으니 말 다했죠 뭐…

    • 1. 제 기억에 저건 김용만 교수님 글에서 본 것을 기준으로 한 겁니다. 고구려에 도교는 624년경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를 놓고 보면 토착 신앙 – 혹은 샤머니즘으로 봐도 크게 틀릴 건 없어 보입니다. 도교의 구성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상당히 복잡한데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보고 계시는 것 같군요.

      2. 팔만대장경에서 다 호국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 적은 없고, 대장경이 만들어진 이유가 국란과 관련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당 전쟁기에도 일종의 주술 의식을 한 게 있는데, 비슷한 부류를 다 모아 보면 재미있을 듯.

      그리고 양란 이후 억불론이 수그러든 거, 저도 압니다.

  3. 고구려에 도교가 전래된 시기인 624년은 중국 도교의 황금기 중 하나인 당나라 시대입니다. 이때 도교는 국가의 엄청난 지원과(당황실이 태상노군 후손이라고 족보 위조를 했죠. 역시 대륙의 스케일입니다), 이전 시대부터 계속되어진 내실 다지기(라고 쓰고 불교/유교/기타 온갖 잡탕 흡수라 해석함)를 통해 나름대로 교리/교단의 체계화가 잡혀있었고, 외단법을 통한 신선술이 크게 두드러져 이미 더 이상 초기의 단순한 기복성이 중심이던 샤머니즘 수준은 아닙니다. 제 전공이 철학과라 좋든 싫든 수도 없이 듣고 봐야 했죠.
    팔만대장경 부분은 제가 잘못 이해했네요.

    • 저도 도교 관련 신화를 공부한 바 있어 대략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에 전래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로 체계가 잡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 샤머니즘은 전통 기복 신앙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하니, 토속 신앙 정도로 고치면 어떨까요.

  4. 삼국사기 등에 고구려 시대 도교 전래라고는 하지만, 출토 유물에서 보이는 도교 문화나 도교 자체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족 샤머니즘의 영향이 큰 점, 고구려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중국과 문화 /교류가 빠르다는 점 때문에 사실 문헌의 도교 전래기록들은 그다지 신뢰되지 않습니다. 설사 그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 해도, 일단 중국 본토의 도교 교단 자체가 이미 체계가 잘 잡혀 있어 지속적인 교류만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체게면에서 부실하진 않을 겁니다. 일례로 현 한국의 정교회만 봐도 정부가에서 정식 교단 인가조차 안 내줄 정도로 교세는 작지만 꾸준히 러시아 정교회 측과 교류하면서 기본 체계성을 잘 잡아 작아도 허술하지는 않거든요.
    사실 토속신앙이라 해도 그것에 대한 확립이 중요한데, 문제는 학게 내 호칭도 연구자나 학파마다 다른 시점이라;;;에전에는 풍류도라고 많이 했는데, 요 근래에는 보통 고신도라고 많이 하는 거 같더군요.

    • 고신도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더 자료를 찾아 본 뒤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관심 감사드립니다.

  5. 한국 토속신앙/사상 연구라면 정재서 교수 저, 이화여대출판부에서 펴낸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가 현재까지는 제일 나은 책입니다.(정재서 교수가 이 분야에서는 유명하죠)이 외에 2007년 3월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에 실린 정재서 교수와 김일권 교수의 논문도 좋고, 김일권 교수의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와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라는 두 단행본도 좋은 책입니다. 금선학회나 다른 데 책들은 좀 편향된 부분도 있어서 추천하기 힘들고, 청소년을 위한 한국철학사는 너무 단편적으로 나와서 권해드리기가 좀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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