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갑옷 생산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작은 대장간에서 헬멧에 망치질을 하는 외로운 대장장이의 모습이 떠오르시지 않으십니까?

애석하게도 이것은 현실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입니다. 적어도 AD 1000년 경의 유럽 전체가 후줄근하던 시절, 엉성해 보이는 쇠사슬 갑옷을 뒤집어쓴 기사들이 돌아다니던 시기를 제외하면 말이죠. 영주님 장원에서 땅 갈아먹던 그 옛날에도 거대한 공급 시스템도 있었고, 요즘 기업들 뺨칠만한 유통망도 있었거든요.

1.

대형 갑옷 공급자로 유명했던 밀라노의 미사글리아Missaglia 가(家)는 아예 마을 하나를 통채로 고용해서 갑옷을 대량 생산, 전 유럽으로 유통시키곤 했습니다. 사실상 요즘 xx중공업이 탱크를 생산해서 국방부에 납품하는 것하고 다를 게 없죠.

작업도 상당히 세분화, 분업화되어 있어서 철사를 끊는 사람, 철판을 다듬는 사람, 쇠사슬을 엮는 사람 등등이 모두 따로 있었으니 작업을 손으로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요즘의 공장하고 다른 점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갑옷들은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짚더미와 함께 커다란 나무 통으로 포장되어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이러한 대형 공급자들은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 있었습니다. 독일 남부에도 있었고, 잉글랜드 왕국에도, 프랑스 왕국에도, 부르군드 공국에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장점을 벤치마킹하면서 제각각 갑옷을 만들었습니다만 결국 두 가지 스타일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는데, 충격 흡수용 홈(Flute)이 패인 뾰족뾰족한 독일식(Gothic Armor)과 둥글둥글한 이탈리아식(Round Armor)이 그것이었죠. 요즘 말로 하자면, 아마 "두 개의 산업 표준으로 정리되었다." 정도가 될 겁니다.

이탈리아식 갑옷. Valentine Armouries에서 제작된 복원품.

독일식 갑옷. 역시 같은 회사의 복원품으로 티롤 대공 지그문트가 쓰던 것을 복제한 것.

이렇게 전문화된 생산 시스템 안에서 영주님의 성 아래 있는 동네 대장간이 갑옷에 대해 한 게 있다면, 아마 자잘한 수리 정도였겠죠.

2.

갑옷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량 생산되기는 했습니다만, 갑옷은 탱크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옷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몸에 잘 맞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즘 보통 사람들은 규격에 맞춰 생산된 기성복을 입고 돈 많은 사람은 양복점에서 정장 맞춰 입듯이 고위 기사들은 맞춤 갑옷을 입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기사나 병사들에게는 기성품으로 생산된 갑옷도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건 적에게서 노획한 갑옷이나, 유행이 지나서1 물려받은 중고품이기 십상이었거든요.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인 만큼 이것 또한 귀한 물건이었고, 따라서 갑옷은 더 진화된 신제품이 나와서 퇴출되더라도 바로 버려지지는 않았습니다. 보다 계급이 낮은 전사들에게 물려지거나, 개조되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었죠.

이렇게 모습을 바꿔 가며 오래오래 쓰이던 갑옷은 그 수명이 다하면 결국 고철로 처분되어 새로운 무기나 갑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게 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물건들은 이 "고철화"를 피한 운 좋은 생존자들인 셈인데, 이들 중에서도 개조를 한 흔적이 있는 물건들이 종종 발견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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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적고 보니 중세 유럽의 갑옷 생산이란 요즘 세상의 옷 구입이나, 방위물품 구입하고 그리 다르지 않군요. 사람이 사는 모습이란, 결국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1. 이건 패션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퇴역한 구식 장비" 라는 의미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