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 최수연, 권민우가 속한 한바다 팀을 이끌고 있는 영우의 오피스 파파 시니어 변호사 정명석은 제주도에 있는 한 사찰과의 소송을 맡기 위해 제주도로 출장을 떠난다. 정명석은 위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상태지만, 팀원들에게는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워낙 몸이 안 좋던 그는 결국 법정에서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가고, 함께 온 일행들은 모두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알게 된다.

1.

최근 인기 폭발중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3화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정명석 변호사가 제주도에 재판 하러 왔다가 법정에서 쓰러지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 장면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찾으셨나요? 모르시겠다면,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아래 장면들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화에서 정변이 처음으로 우영우를 소개받는 장면입니다.

4화 끄트머리에서 일하다가 밤을 샌 정변의 모습입니다. 우영우가 노크를 하자 잠에서 깹니다.

3화에서 자폐인인 의뢰인 앞에서 단체로 펭-하!를 외친 직후의 모습입니다.

네, 13화의 이 장면에서 정변이 차고 있는 시계는 이전에 차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전 장면들에서 정변은 클래식한 디자인의 은색 브레이슬릿 시계를 차고 있습니다. 팔을 내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소매에 가려지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시계를 차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려운 물건이죠. 하지만 제주도에서 법정에 출석할 때는 검정 가죽 스트랩이 장착된, 아주 큼지막한 시계를 차고 있습니다. 위 장면에서 잡힌 시계가 바로 그 물건입니다.

2.

그게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신다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실제로 지난 주 방영된 13, 14화에서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던 정변의 과거가 밝혀져서 화제가 되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시계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엔 정변의 과거와 이 시계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많은 화젯거리를 몰고 왔지만, 저는 지금까지 조금 다른 관점 이라기보다 ㅆ덕본능 을 가지고 드라마를 봤습니다: "정변은 시계를 두 개 가지고 있는 모양이네? 법정 나갈 때는 얌전한 거 차다가 편하게 있을 때는 좀 요란한 걸 차는 것 같고? 뭐 그게 맞긴 한데, 저 요란한 물건은 대체 뭐지? 정변 성격하고도 안 어울려 보이는데, 어디서 저런 게 난 거냐고?"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갈수록 정장이 요구되는 곳이 줄어들고 시계를 차는 사람도 드물어져서 자주 잊는 것이지만, 남성 정장에 차는 시계는 디자인도 무난하고 클래식한 게 선호되고, 가능하면 셔츠 소매 안에 쏙 들어갈 수 있도록 크기도 작은 것이 정석입니다. 1화에서 우영우가 상사인 정변을 처음 만날 때 차고 나온 시계가 딱 여기에 해당하죠 - 정변의 직업적 특성상 옷차림이 일반인보다 훨씬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감안하면 더 그렇습니다. 반면 저 장면에서 차고 나온 큼직한 검정 가죽 스트랩 시계는 스타일이 정반대입니다. 못 찰 건 없지만, 정변의 직업적 특성과 온화한 성격을 생각하면 좀 안 맞는 물건이죠.

제가 이 글 쓰면서 다시 확인해 보니, 소매 안에 쏙 들어가는 금속 브레이슬릿 시계는 12화까지 꽤나 많이 등장했고, 그 중 절반 가량이 법정이나 법원에서 등장했습니다. 카메라가 권변의 소매를 잘 비추지 않는 데다 비추더라도 시계가 가려져서 안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게 기본 착장이라고 보는 게 맞겠죠? 아래는 제가 확실히 찾은 장면들입니다:

  • 1화: 정변이 우영우를 처음 만나는 장면.
  • 2화: 정변이 법정에서 증인을 심문하는 장면.
  • 3화: 자폐인 의뢰인을 상담하러 가서 펭하를 외치는 장면.
  • 4화: 밤을 샌 정변의 모습을 비추는 장면.
  • 6화: 워워 + 작전 회의를 하면서 '딱딱한 우영우' 에게 변론을 맡기는 장면.
  • 12화: 우영우가 한바다가 과거 했던 탈법 해고 관련 컨설팅 보고서를 가지고 와서 알고 있었냐고 따지는 장면.

6화의 명장면, 워워입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시계가 소매에 가려서 잘 안 드러나는 게 정석입니다.

하지만 검정 가죽 스트랩을 가진 큼지막한 시계는 그보다 덜 등장했습니다. 이건 소매에 숨겨지거나 할 수도 없는 물건이니 기본 착장은 아니겠죠? 재미있는 건, 그 중에서 법정에서 찬 건 단 한 번 뿐이라는 겁니다.

  • 3화: 편안한 차림의 정변이 눈에 안약을 넣을 때.
  • 4화: 우영우의 사직서를 펼쳐보던 순간.
  • 7화: 의뢰인들과 편한 분위기로 미팅을 할 때.
  • 11화: 로또 당첨금 분배 관련해서 법정에서 공동 분배 약정에 대해 변론하는 장면. 유일한 법정씬.

이 시계는 3화에서 정변이 눈에 안약을 넣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안 좋을 때 첫 등장을 한 셈인데, 다시 생각해 보니 복선인 것 같습니다. (저 안약은 안구건조증 환자들이 쓰는 히알루론산나트륨 점안액인데, 주 사용자는 상습 과로자들입니다. 저렇게 아침에 한 번, 자기 전 한 번 넣습니다.) 이 시계를 차고 있다가 조금 있다가 자폐인 의뢰인이 오자 다시 단정한 스타일로 갈아차고 나갑니다.

4화에서 정변이 우영우가 제출한 사직서를 펼쳐보는 부분입니다. 워낙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장면이라 일부러 멈춰보지 않는 한 보이지 않습니다.

11화의 법정씬입니다. 6화의 비슷한 장면을 보면 은색 브레이슬릿 시계는 끄트머리만 아주 조금 보입니다만, 이 시계는 이렇게 아주 훤히 보입니다.

그러니까 정변은 쓰러지던 순간, 평소에는 잘 차지도 않던 심지어 직업이나 성격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계를 차고 있는 겁니다. 보통 저 부분을 대충 넘기는데 저 같은 시덕 사람 눈에는 거의 갑툭튀인 거죠.

정변이 단순히 시계를 좋아해서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13화에서 제주도로 떠나는 한바다 팀을 보면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지 않습니다.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티셔츠를 입는 한이 있어도 맨손목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니까 (실제로 제가 그렇습니다) 정변이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3.

제 궁금증들은 13화의 한 장면에서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정변이 한바다 팀과 둘러앉아서 아내에게 이혼당한 이야기 - 그것도 제주도로 신혼 여행을 갔을 때를 회상하던 장면이죠. 신혼 여행지에서도 클라이언트의 전화를 받는 정변에게 아내가 "지금이 몇 시야?!" 라고 짜증을 부리는 장면에서 이 시계가 클로즈업 되는데, 아래 장면입니다.

정변이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간 것은 일 때문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클라이언트의 전화를 받아야 했거든요. 하지만 결국 첫날밤도 제대로 못 치르고 새벽 4시까지 또 일을 하고 맙니다.

사실 저 "지금이 몇 신 줄 알아요?" 라는 대사는 이 드라마에서 두 번째 나왔습니다. 첫 번째는 8화였지요 - 뭐, 새들도 아가양도 명석이도 잘 시간이니까요.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때 정변이 화를 안 내는 것도 복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궁금증, "저 요란한 시계는 대체 무엇인가?" 제작진이 브랜드 이름을 지우고 로고 위치를 살짝 변경해 넣었지만, 저는 한 번에 알아보겠더군요. 저 시계는 브라이틀링 네비타이머 01(Breitling Navitimer 01)입니다. 스위스의 시계 제조사 브라이틀링이 1954년 미국 조종사 협회(AOPA)와 합작으로 개발해 출시한 시계의 후속 기종인데, 말 그대로 아메리칸 스타일인 데다가 지름이 46mm나 되기 때문에 동양인 손목에는 좀 큽니다. 정장 차림에 이런 걸 차면? 소매 안에 절대 안 들어가는, 아주 노골적으로 요란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죠. 아, 이게 브라이틀링 시계인지 어떻게 확신하느냐구요? 의심스러우신 분들은 지금 당장 스크롤을 올려서, 우영우의 사직서를 펴보는 정변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의 버클 위 로고를 다시 보고 오시죠.

브라이틀링 네비타이머 01(2016년판). 2018년부터 로고에 달려 있던 날개가 없어졌기 때문에 현행 모델과는 조금 모양이 다릅니다. 저는 을지로에 있는 롯데백화점 본점에 구경 갔다가 손목 위에 한 번 올려본 적이 있는데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커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3.

그럼 이제 두 번째 궁금증을 살펴볼까요? "정변은 어떻게 저 시계를 가지게 되었나?" 제가 보기에 저 시계는 결혼 예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시계에 별 관심도 없는 남자가 평소 일할 때 입는 정장에도 잘 어울리지 않는 시계를 굳이 살 이유는 이것 외에는 생각하기 어렵거든요. 실제로 브라이틀링 네비타이머 01은 꽤나 오랫동안 남성들의 결혼 예물로 선호되던 시계였습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계가 있지만, 결혼 예물로 쓸 만큼 검증된 디자인과 품질을 갖춘 시계는 의외로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 그리고 네비타이머 01은 그 중의 하나인 겁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저 시계가 등장한 장면들을 그냥 지나치셨을 겁니다. 그냥 신혼 여행 중에서도 밤 늦게까지 일에 매달리는 정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소품 정도로만 생각하셨겠죠.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 시계는 정변의 실패한 결혼이 남긴 흔적인 동시에 정변이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던 순간을 지켜본 증인인 겁니다. 이 기계는 첫날 밤 정변이 새벽 몇 시까지 일에 매달렸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시계의 기본적인 소임을 다 하지만, 그 뒤에도 정변이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순간을 계속해서 상기시킴으로써 단순히 시간을 알리는 기계를 넘어섭니다. 시계를 넘어선 시계, 이것이 저 짧게 지나가는 소품의 정체입니다.

사실, 정변이 이 시계를 찬 장면은 14화 끄트머리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즉, 은색 브레이슬릿 시계는 기본 착장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 등장한 바가 아예 없습니다.) 퇴원하는 날 짐 싸는 걸 도와주러 온 이준호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죠. 여기서 정변은 우영우에게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은 이준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젯밤 꿈에서는 내가 전처한테 싹싹 빌었거든? 아니 근데, 정작 오늘 아침에 전화왔을 때 나 그런 말 한 마디도 못 했어...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꽉 잡어. 어쩌다 한 번 놓쳤다? 그래도 다시 가서 꽉 잡어." 이 이야기를 하는 정변의 손에는 다시 이 시계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 장면입니다. 잘 보면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데, 오른손에는 소매가 보이지 않는 반면 왼손에는 소매 아래 검정색이 보입니다 - 위에서 이야기한 검정 가죽 스트랩 시계를 차고 있는 거죠.

4.

정명석은 겉으로는 온화한 사람을 연기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실패한 결혼의 흔적 속을 산다. 그는 시계에 별 관심이 없지만, 신혼 여행지에서 전처에게 상처를 주던 자기 모습을 기억하는 결혼 예물 시계만은 어딘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위암 3기 판정을 받은 그는 신혼 여행지였던 제주도로 출장을 갈 일이 생기자, 평소 잘 차지도 않던 시계를 챙겨서 여행길에 오른다. 재판이 잡힌 날 아침, 그는 몸이 좋지 않음에도 이 시계를 찬 채 억지로 재판에 출석하고 결국 그대로 재판정에서 쓰러진다.

병원에 입원한 정명석에게 지난 5년간 못 보던 전처가 달려온다. 전처는 우영우 앞에서 "저 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며 푸념을 늘어놓지만, 사실 아내에게 상처를 주던 신혼 시절의 정명석과 지금의 정명석은 많이 다른 사람이다. 지금의 정명석은 장애를 앓는 부하 직원의 심정을 섬세하게 헤아리고 심지어 충동적으로 던진 사표를 보류한 채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정명석의 손목 위에 올려진 결혼 예물 시계 뿐이다. 이 시계는 정명석의 그 모든 시간들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정명석은 꿈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전처에게 싹싹 빌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결국 퇴원하는 날 아침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온 전처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사건이 모두 끝나고 병원으로 찾아온 이준호 앞에서, 그는 결혼 예물이었던 시계를 다시 꺼내어 차고 자기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5.

제작진은 이 작은 소품 하나로 정명석의 내면에 새겨진 이 많은 이야기들을 오밀조밀하게 담아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데는 이런 섬세함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는 점도 한몫 하지 않았나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권민우입니다. 가장 현실적이고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라는 점도 그렇지만, 과거 제 모습이 슬몃슬몃 엿보이는 캐릭터이거든요. 제주도 에피소드부터 캐릭터 붕괴죄(...)를 대거 자행중입니다만 이왕 죄를 지은 거 긴급 체포될 수준까지 붕괴되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레이디 최수연과 그녀의 나이트 권민우 경

제가 보기에 이 드라마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최수연 변호사입니다. 박소담 뺨치는 비현실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저런 캐릭터가 권민우한테 한 마디도 안 지는 게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어렵거든요. 다정함도 엄연히 습관 같은 거라, 이런 사람들은 주위에 모질고 심술궂은 사람이 있어도 싫은 소리를 잘 못 합니다. (개발자(♂) x 경영지원(♀) 조합이면 더 그렇습니다.) 저는 한바다 팀만한 작은 스타트업에 다니던 시절 이걸 경험했는데, 지난 달에 오랜만에 직접 볼 일이 있어 뒤늦게나마 사과를 했더니 수줍게 웃기만 하더군요. 사람 참 안 변하는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2주 전에도 또 진상을 부려댔다는 건 안 자랑

※ 이 글의 제목은 Nell의 2008년 노래 『기억을 걷는 시간』에서 가져왔다.


이야기 나온 김에 최변의 시계에 대해서도 슥슥.




13-14화에 등장한 최변의 시계입니다. 모두 함께 제주도로 가기로 하는 장면, 절과 통행료 시비가 붙는 장면, 편을 가르는 장면 그리고 권민우와 둘이서 사랑 싸움 이야기하는 장면에 나온 시계가 전부 다릅니다 - 웬만한 시덕보다 더 시계가 많을 것 같은데, (여자 시계라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샤넬과 에르메스가 적어도 하나씩은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권민우는 평소 차던 시계를 그대로 차고 제주도로 왔는데, "아빠는 판사고 오빠는 의사인 최수연 공주님"과 적잖은 돈을 벌면서도 항상 쪼들리는 권민우의 차이가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3화 초반, 명패 앞에서 좋아하는 우영우를 찍어 주는 최변의 모습입니다. 여기서도 다른 시계를 차고 나왔는데 (까르띠에?) 최변이 극중 착용한 시계들로만 여성지 특집 기사 하나는 족히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극중 다른 등장인물인 이준호의 시계에 대해서는 무신사에 올라온 이 글을 참조.
+2. 고래 이야기를 더 읽고 싶으신 분들은 이 글 추천. 1년도 더 전에 쓴 글이지만 대세 드라마에 묻어가는 비열함을 발휘해보자